아리랑

Ⅵ. 경기아리랑(본조아리랑)

운학처사 2011. 3. 22. 21:39

 

Ⅵ. 경기아리랑(본조아리랑)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이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라


아라사 아차하니 미국놈 믿지 말라 영국은 영 글렀다 일본놈이 일등이다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므나

남산 밑에다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만 한다

아리랑고개다 정거장 짓고 전기차 오기만 기다린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의 신세가 웬 말이냐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되네

말 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 깨나 허는 놈 공동산 가네

아 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 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조선 팔도 좋다는 나무는 경복궁 짓느라 다 들어간다

마고자 실갑에 서양 총 메고 북망산 벌판에 접전가자

경성부내 불은 소방차가 끄고 요 내 가슴 불은 어느 낭군이 끄나

자동 기차는 서양식으로 놀구 우리 님 사랑은 이 내 품에서 논다

할미성 꼭대기 진(陣)을 치고 왜병정(倭兵丁)오기만 기다린다

오라배 상투가 웨 그런고 병자년(內子年) 지내고 않그런가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를 어데 두고 전주(全州)야 숲에서 유시했노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全奉準)아 양에다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전했네

우리 딸 보지는 금 보지인지 열 넘는 식구를 다 살려 간다

우리 딸 수단은 별 수단이지 열 넘는 식구를 다 살려간다

우리 딸 품행이 얼마나 방정한지 공단속 옷감이 열두채 난다


본조아리랑이란 일반적으로 지금은 '본조아리랑'의 곡조나 '서울아리랑'곡조를 '신아리랑' 곡조와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화〈아리랑〉에서 아리랑이 불려지는 장면은 여섯번쯤으로 알려졌다. 신일선 독창과 남궁운의 기타 반주 그리 고 마지막 나운규가 포승에 묶여 고개를 넘어가면서 부르는 장면등이다. 이 아리랑은 나운규의 회고기 1937년 1월호 「삼천리」(통권 81호)에 발표한〈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이나「영화소설 아리랑」(문일·1929년·박문서관) 등의 기록에 "나운규 작사, 단성사 음악대 편곡"으로 나오는 것이다. 1960년대 김진균교수가 이를 "본조아리랑"으로 명명했으나 정확한 명칭은 아닌 듯 하다. 이 명칭에 대해서는 이보형의 논문 <아리랑소리의 근원과 그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를 참고 할 수 있다.

 

1. 경기 아리랑의 전설

1)경기 아리랑의 전설 개괄

경기 아리랑의 전설은 경기도 어느 지역에 리랑이라는 노복과 성부라는 노비의 사랑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2)경기 아리랑의 전설 내용

옛날에 벼슬에서 낙향한 김 판서라는 사람이 경기도 어느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원래 갖고 있던 자산으로 인근 농토를 장악하여, 장리, 도지, 물세 등을 가혹하게 받아내는 고리 부자였다. 이렇게 되다보니 이 김 판서에게 안 걸리는 농민은 하나도 없었다. 농민들은 해가 갈수록 끼니를 에워나가기가 힘들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까지 엎치고 겹쳐 마을 사람들은 쌀 한 톨 없는 아사 직전이었다.


농민들은 이런 난판이 될 수록 해결하기 위해 김 판서를 찾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 판서의 냉혹한 수탈은 하늘을 치솟으며 심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김 판서에 대한 원망으로 생각이 모아지면서, 참다못한 군중심리가 극에 달해 갔다. 드디어 이 난세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김 판서를 쳐 없애야 한다는 결론으로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럴 당시에 김 판서의 집에는 리랑이라는 노복과 성부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 둘은 서로가 눈치로 좋아하면서, 속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리랑은 동네 사람들의 이러한 모의가 옳다고 생각하여 깊이 가담하게 되었다. 리랑을 사모하고 있는 성부도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 반대할 이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의 모사는 순조롭고 빈틈없이 잘 행사되도록 진행되어 갔다.


마침내 준비는 완료되어, 거사일로 예정한 시월 그믐날 밤이었다.


달도 비추지 않는 캄캄한 어둠을 틈타 마을 농민들은 김 판서의 집으로 들이 닥쳤다. 영문을 모르는 김 판서를 그냥 단숨에 해 치우고, 이를 처단한 농민들은 기세를 몰아 곧장 관가를 습격하여, 닥치는 대로 아전을 죽이고 소동을 피웠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황급히 관군을 풀어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힘이 있는 관군들의 창칼 앞에 농민들은 이겨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어떻게, 어떻게 다행히도 성부와 리랑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재하여 마을을 탈출했다. 그들은 산을 타고 도주하여 인적이 드문 수락산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관군들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성부와 리랑의 사랑은 뜨거워져 결국은 부부로서 함께 연을 맺어 얼마동안 그런대로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리랑의 마음 한구석에는 억울하게도 불쌍하게 죽어 간 농민들이랑 일을 이렇게 만든 탐관오리들에게 대항해야겠다는 재 거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다시 사람을 규합해서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차마 정주고 살아 온 어여쁜 성부를 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아픔은 컸지만 거사를 할 계획에 집착하여 말고 나가야 한다는 각오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리랑은 괴롭고 힘들었지만 자기의 속뜻을 성부에게 표현했다. 성부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승낙을 했다. 리랑은 약속하기를 꼭 백일이 되면 돌아 올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깊은 산 중에 홀로 남은 성부는 리랑이 돌아올 날을 손  꼽아 기다리면서, 열심히 밭을 일구고 살았다. 날이 어둑어둑 질 녘이면 성부는 그리운 리랑을 불렀다.


성부의 이러한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성부의 아름다운 모습에 차츰 동네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쑥날쑥한 어느 날,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음탕한 산마을 부자 백가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날부터 백가는 온 사력을 다해 측은 거리며 성부를 못살게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시작했다.


백가의 등살을 피하면 피할수록 성부를 쫓아다니며 백가는 눈먼 장님이 되어   더욱 두리번거리면서 충혈 되고 있었다.


이제는 아주 매일같이 찾아와 아랫목에 버티고 앉아서는 갈려고 하지를 않았다.


어떻게 하던지 성부는 이 백 부자를 속여 넘기면서 견디기로 하였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성부는 더 이상 그를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성부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리랑의 제사만이라도 치르고 몸을 허락하겠노라 백부자에게 말했다. 백부자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이제 리랑의 거짓 제사가 치러지는 날이다. 백부자는 새벽부터 달려 와 성부의 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성부는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날이 바로 리랑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던 그 백일이 되던 날이었다.

성부는 리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어두워지기를 고대했다.


밤이 깊어졌다. 백부자는 이제 됐구나 하고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빨리 제사를 치르라고 성화를 해댔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들렸다. 불쑥 한 사나이가 방문을 열어 젖혔다. 한동안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리랑은 본 그대로를 인정하여 비수가 뽑아 들었다. 번득이어 백부자를 한 칼에 쓰러뜨렸다.


리랑은 아내 성부가 백부자와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잘못 알았다. 그렇게 의심이 가자 끓어 분노의 칼날이 성부를 향했다.


그러나 차마 리랑은 성부를 죽일 수가 없었다. 성부야 나는 간다. '나는 간다라는 이 말을 남기고 정처 없이 흘쩍 성부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그리던 임을 어이없이 떠나보낸 성부는 몇 날 며칠을 사라진 리랑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성부는 리랑을 부르며 산속을 해매이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어 갔다고 한다. 그 후에 사람들은 리랑, 리랑 부르던 성부의 메아리가 아 리랑 아 리랑 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2. 경기아리랑

경기 아리랑은 경기 민요이다.


3. 경기민요

1) 경기민요는 서울과 경기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 민요이다.

2)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종류 : 민요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지정연도 : 1975년

3) 경기민요는 서양음악의 장조와 비슷한 평조로 된 가락이 많다. 창법은 깨

   끗하고, 경쾌하며 가락과 악절이 분명한 도시풍의 노래이다. 음 빛깔은

   부드럽고, 유창하며 서정적이다.

4) 경기민요 장단은 굿거리장단, 세마치장단, 자진모리장단, 타령장단을 사

   용하며 경기민요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아리랑, 도라지타령, 노들강변,

   닐리 리야, 군밤타령, 개성난봉가(박연폭포), 양산도, 경복궁타령, 노랫가

   락, 방아 타령, 뱃노래, 태평가, 풍년가, 한강수타령 등이 있다.


4. 경기 아리랑의 가사

후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뛰어라 노다 가라.

1)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므나

2) 남산 밑에다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총만 한다.

3) 남산 우에다 고목나무를 심고 나와 같이만 속 썩는다.

4) 아리랑고개다 정거장 짓고 전기기차 오기만 기다린다.

5)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의 신세가 웬 말이냐

6)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되네


7) 말 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허는 놈 공 동산 가네.

8) 일본 놈 순사들은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녀간다.

9) 아 깨나 낳을 년 갈보 질 가고 목도 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10) 조선 팔도 좋다는 나무는 경복궁 짓느라 다 들어간다.

11) 마고자 실 갑에 서양 총 메고 북망산 벌판에 접전가자

12) 불은 소방차가 끄고 요 내 가슴 불은 어느 낭군이 끄나

13) 자동 기차는 서양식으로 놀구 우리 님 사랑은 이 내 품에서 논다

14) 할미 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정오기만 기다린다.

15) 오라 비 상투가 왜 그러는가, 병자년 지내고 안 그러는가

16)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를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서 유

    시했노

17)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양에다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전

   했네

18)우리 딸 보지는 금 보지인지 열 넘는 식구를 다 살려 간다.

19)우리 딸 수단은 별 수단이지 열 넘는 식구를 다 살려 간다.

20)우리 딸 품행이 얼마나 방정한지 공단 속옷감이 열두 채 난다.

 

5. 본조 아리랑

* 본조아리랑이란 일반적으로 지금은 본조아리랑의 곡조나 서울 아리

  랑 곡조를 신 아리랑 곡조와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 학설이 있다.



    참고: http://www.arirang365.com/8.html#서울·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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