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동주열국지 고사 및 역사

운학처사 2009. 7. 3. 09:20

무더운 여름 고전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일이 아닌가 합니다.(오 탈자가 적지 않습니다.)

동주열국지 고사 및 역사 목차

고 사

역 사

내용

내용

내용

내용

1

대의멸친

16

주(周)

32

춘추 국제질서

48

필의 전투

2

경국지색

17

공화(共和)

33

기강지복

49

상하기수

3

만승지국

18

중원(中原)

34

성복의 전투

50

장화궁

4

만전지계

19

춘추(春秋)

35

송양지인

51

삼환씨의 전정

5

불공대천지수

20

봉건제도

36

천토의 회맹

52

소왕

6

파죽지세

21

경대부(卿大夫)

37

한식절

53

손자병법

7

황천의 재회

22

맹세의식

38

방백(方伯)

54

의협(義俠)

8

관포지교

23

 승(乘)

39

삼황오제

55

투금뢰

9

순망치한

24

잉첩(媵妾)

40

여화씨

56

오월의 제철

10

범주지역

25

초무왕

41

구정

57

고소대(姑蘇臺)

11

오월동주

26

회맹(會盟)

42

문정

58

향섭랑(響屧廊)

12

와신상담

27

여성의 호칭

43

필주

59

전국시대

13

서시빈목

28

계절존왕

44

약오씨의 난

60

양사(養士)

14

토사구팽

29

규구의 회맹

45

신선사상

61

전국사군자

15

계명구도

30

존왕양이

46

결초보은

62

합종과 연형

 

 

31

패자(覇者)

47

언릉의 전투

63

한비자

 


동주열국지 고사

(김구용옮김, 풍몽룡지음)

1권

1. 대의멸친(大義滅親)

중대한 의리나 명분을 위해서는 골육의 사정(私情)도 가차없이 끊어버린다는 의미, 위나라의 현신 석작(石碏)이 혼군(昏君)주우와 작당해 온갖 간계를 일삼던 불초자 석후(石厚)를 냉정히 처형하여 위나라를 반정(反正)시긴 사적에서 유례


2. 경국지색(傾國之色)

한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의 미색을 의미하는 말로, 주유왕을 뇌쇄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해 결국 서주의 몰락을 초래한 포사(褒似)의 고사로부터 유래, 전한의 조비연, 당의 양귀비 등도 대표적인 경국지색 미녀로 꼽힌다.


3. 만승지국(萬乘之國), 萬乘之君, 萬乘之位)

일만승의 전차와 그에 부속된 군사, 무기 등을 보유하고 동원할 수 있는 거대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나라, 군주, 또 그러한 지위를 각각 지칭하는 말.


4. 만전지계(萬全之計)

모든 조건들과 가능성을 십분 고려한 아주 안전한 계책이나 꾀를 의미하는 말로, 정장공이 책사 중의 책사인 제족의 탁월한 계략을 이같이 극찬했다. 만전지책(萬全之策)도 같은 의미


5.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

같은 하늘을 받들면서 함께 살 수 없는 지독한 원수라는 뜻. 주이왕 시기에 기나라 제후가 제의 애공을 주이왕에게 참소하여 팽살당하게 했는데, 이 사건을 제나라 후손들이 절대 잊지 못하면서 기나라는 결코 함께 살 수 없는 흉악한 원수이므로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벼르고 이 말을 사용했다.


6. 파죽지세(破竹之勢)

칼로 대나무를 가르듯이 맹렬하게 뻗어나가 아무도 멈출 수 없는 노기등등한 기세를 일컫는 말, 정장공은 제․노와 연합하여 송宋 진陳 衛 등 주변 소국들을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정벌하면서 파죽지세처럼 해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다.,


7. 황천의 재회

고대인들은 천지신명에 대한 맹세의 주술적 영적효력을 굳게 믿었으며 일단 맹세한 내용을 깨뜨리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맹세를 어기는 행위를 금기시했다. 정장공이 황천(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흐르는 강)에 가기 전까지는 어머니를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그것을 깰 수 없어 뼈아프게 후회한 것은 고대인의 이 같은 주술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영고숙은 황천을 글자 그대로 지하를 흐르는 누런색의 물 곧 지하수로 해석해 정장공으로 하여금 지하수를 파고 그곳에서 모친과 재회하도록 하는 기발한 꾀를 냄으로써 맹세를 어기지도 않으면서 모자를 무사히 화해시켰다.

2권

8. 관포지교(管鮑之交)

제나라의 명신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둘도 없는 평생의 교분과 우정을 지칭하는 말, 전(轉)하여 지란지교(芝蘭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3권

9.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로, 서로 지극히 친밀하고 상보하는 양자 중 어느 한쪽이 망하거나 불행해지면 다른 한쪽도 곧 그렇게 된다는 뜻. 춘추시대의 절친한 이웃 나라였던 우와 괵이 진나라의 상경인 순식의 이간 계책에 넘어가 서로 돌보지 않게 된 결과, B.C.658년과 65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진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둘 다 멸망당한 사례에서유래된 말. 순망치한에 해당하는 사례들은 동서고금을 통해 수다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나 특히 춘추시대의 우, 괵 양국의 고사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꼽힘.


10. 범주지역(帆柱地役)

많은 배들을 강에 넘칠 정도로 띄운 대역사(大役事)를 의미. 기원전 647년(진혜공 4년)에 진(晉)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진목공(B.C.659~637) 재위)의 간청을 수락하여 막대한 양의 곡식을 원조했는데, 그들을 모두 운반하기 위해서는 양국 사이를 흐르는 위수, 분수에 넘칠만큼의 많은 배들을 띄워 보내야 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음.


9권

11. 오월동주(吳越同舟)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이 한 배에 탔다는 의미.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시대후기에 장강하류 지역에 대한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한 앙숙관계의 나라들이었으므로(오, 월 양국의 항쟁과 대립은 9권의 주요내용을 이룸). 이들 양 적국 사람들이 한 배를 탔다는 것은 원수끼리 정통으로 마주쳤다는 의미. 곧 우리 속담의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임.


12. 와신상담(臥薪嘗膽)

땔나무 위에 누워 아픔을 참으면서 자고, 쓸개를 거듭 씹으면서 쓴맛을 감내한다는 의미로.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고생과 아픔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일을 가리킴. 춘추시대 후기인 B.C.496년에 오나라는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고 오왕 합려(B.C. 514-496)도 이 전투에서 큼 부상을 당해 서거했음. 이에 합려의 아들 부차(B.C.495-473 재위)는 날마다 딱딱하고 차가운 땔남 위에 누워 자면서 자신의 몸을 학대해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동시에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여 3년 뒤인 B.C. 494년 월나라를 대파해 궤멸 직전까지 가게 했음. 잠깐 방심한 사이에 참담한 패배와 치욕을 당한 월왕 구천은 날마다 쓸개를 핥으면서 지난날의 치욕을 상기하고 적개심을 계속 북돋우며 그로써 보복전을 철저히 준비하여 마침내 20년 뒤인 B.C. 473년에 오나라를 멸국시켜 원수를 갚고(춘추후기 국제 질서의 주요 축이었던) 오, 월 양국의 항쟁을 종식시켰음. 이 고사로부터 자신의 목표(특히 원수를 갚는 일)를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음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됨.

 

13. 서시빈목(西施顰目)

글자상으로는 서시가 눈을 찡그린다는 뜻. 월나라 출신으로 오왕 부차의 애첩이 된 절세의 미인 서시가 어느 날 불쾌한 일이 있어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였다고 함. 이를 우연히 보게 된 한 추녀가 자신도 그렇게 하면 아름다워 보일 줄로 착각하고 얼굴을 마구 찡그렸더니 동네 사람들이 보기 싫어 모두 도망갔다는 고사가 전해짐. 이로부터 파생된 “효빈”이란 말은 자신의주제도 모른 채 무턱대고 어리석게 남의 흉내를 내는 일을 가리킴.


14. 토사구팽(免死拘烹)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잡혀서 삶아진다는 뜻.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그 목적에 이용된 도구나 사람은 무용하게 되어 배척되거나 제거된다는 의미. 토사구팽에 해당하는 사례는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중국 전체역사를 통해 수다하게 찾아볼 수 있으나 9권에서는 특히 망국과 죽음을 눈앞에 둔 오왕 부차가 월나라의 양대 책사 범려와 문종에게 오나라의 멸망을 막아보려고 설득하고 회유하는 문구로 인용되었음(곧 월왕이 오나라를 멸망시켜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다음 차례는 그대들이므로 그대들도 미리 살 길을 도모하라는 의미). 이 외에도 한나라 명장 한신이 한 고조 유방을 제왕으로 세우는 데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아끼지 않았으나 막상 유방이 제위에 오른 후 자신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차례로 겁박하여 숙청하는 상황을 보고 토사구팽의 세태를 한탄하면서 죽었다는 일화는 유명함.


11권

15. 계명구도(鷄鳴狗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닭 울음소리를 내고 개처럼 도둑질을 한다는 뜻으로, 전국 사군자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맹상군과 관련된 고사, 맹상군이 B.C. 298년에 진소양왕(B.C.306-251 재위)의 초청으로 진나라에 초빙되어 갔다가 우승상 저이질의 참소로 처형당할 위기에 모이자, 이전에 제나라에 있을 때 맹상군에게 많은 신세를 진 소양왕의 동생 경양군이 소양왕의 애첩에게 부탁해 맹상군을 구해주도록 요청했음. 이때 소양왕의 애첩은 천하의 둘도 없는 보배인 백호구(100년 묵은 여우의 흰 겨드랑이 털만을 모아 짰다고 하는 외투로, 1000금의 값이 나간다고 함)를 요구했는데 맹상군이 단 두벌만 갖고 있는 백호구 중 한 벌은 제나라에 있고, 한 벌은 진에 입국했을 당시 소양왕에게 이미 선물로 바쳐  어찌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음. 이때 맹상군을 수행한 빈객들 중에 개흉내를 내면서 진나라의 창고에 잠입해 맹상군이 바친 백호구를 도둑질 해 왔음. 맹상군은 기뻐하며 그 백호구를 애첩에게 바쳤고그녀의 간곡한 주선으로 소양왕으로부터 제나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음. 이어 맹상군 일행은 서둘러 제나라로 도망쳤는데, 뒤늦게 맹상군을 석방한 사실을 후회한 소양왕은 군사들을 보내 맹상군 일행은 계속 쫓기면서 급히 말을 달려 한 밤중에야 가까스로 진나라 국경관문에 도착했는데 새벽 첫닭이 울어야만 관문이 열리기 때문에 사태가 매우급박하게 된 중에 역시 빈객 중 한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낸 덕분에 무사히 진나라를 벗어나 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음. 사지를 벗어난 맹상군은 계명구도(鷄鳴狗盜)한 두 빈객을 매우 치하하면서 그들을 상객으로 높였고 이에 다른 모든 빈객들이 부끄러워했다고 함. 본래 그들 두 사람은 닭 울음소리를 내고 개 흉내를 내는 것 외에는 달리 재주가 없어 모든 빈객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의 목숨을 구하는데 대공을 세우게 되었음. 이로부터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도 반드시 언젠가는, 어디엔가는 요긴하게 쓸모가 있으므로 결코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전국시대의 양사는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 채 모든 선비들을 평등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포용력 있는 정신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임. 



동주열국지 역사

1권

16. 주(周)

기원전 11세기 말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계속된 중국 고대 왕조, 주족(周族)의 시조 후직(后稷)의 14세손인 무왕이 선조들의 왕업을 토대로 은왕조를 물리치고 주를 건국한 후 호경에 도읍했다. 기원전 770년에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동쪽의 낙읍으로 피난하기 전까지 이상적인 덕치와 봉건제도를 베풀어 후대 유가들에게 예교문화의 황금시대로 추앙되었다. 왕실의 동천을 계기로 그 이전을 서주, 그 이후 멸망 때까지를 동주라고 칭한다.


17. 공화(共和)

기원전 841년에 호경에서국인 폭동이 일어나 주여왕이 쫓겨난 후, 경대부와 국인들의 추대를 받은 공백(공나라의 군주인 백작) 화가 체읍으로 도망간 주여왕을 대리하여 주여왕 사망  때까지 14년간 통치를 맡은 시기를 지칭함. 827년에 주여왕의 태자가 주선왕으로 즉위하면서 공화시기는 종결되었다.


18. 중원(中原)

중국문화의 발상지인 황화 중상류의 남북 양안지대를 지칭하는 말로 중화의 중심지, 중국문명의 요람 등을 뜻한다. 역사적으로는 중국사의 여명기에 이상적인 황금시대를 구가하면서 중화문화의 골격과 근간을 마련한 전설적인 3대 왕조인 하(夏)(B.C. 2000-1600년경),상(商)(B.C. 1600-1122), 주(周)(B.C. 1122-256)등이 통치한 중심 영역으로 가리키며, 지리적으로는 현재의 섬서성, 하남성, 산서성 등과 산동성, 하북성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본 소설의 2-4권에 자주 등장하는 중원의 제후란 대략 이지역들에 위치한 정(鄭),송(宋),위(衛),진(晉),진(陳), 조(趙), 허(許),, 제(齊), 노(魯), 채(蔡) 등의 제후국들을 말한다. 후대에도 중원은 중국 역대 왕조의 중심지 내지천하 패권의 핵심 지역이라는 관용적인 의미로 널리 쓰인다.


19. 춘추(春秋)

기원전 770-453년까지의 역사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 서주의 동천으로 인해 이전까지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된, 주와의 천자로서의 존엄한 권위와 봉건질서가 무너지면서 각 지방의 유력 제후와 그들의 가신인 경대부들이 할거하여 상호 간의 세력 다툼과 영토확장경쟁에 매진하는 분열과 격동의 시대.

서명(書名). 춘추시대를 다룬 역사서, 공자가 지었다는 전설이 오랫동안 신봉되었으나 현재는 공자 저술설은 <춘추>라는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후대유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며 실제로는 노나라의 역대 사관들이 여러 세대를 통해 합동 저술한 노나라 역사서로 인식되고 있다. 기원전722-479년의 243년 간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하되 노나라를 중심으로 다수 제후국들의 경쟁과 천하세력 판도의 변동, 제후와 경대부 간의 분쟁 등을 사실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춘추시대의 역사상을 잘 보여준다. 춘추라는 시대 명칭도 이 책에서 유래되었다.


20. 봉건(封建)제도

주무왕이 서주를 건국한 후 천하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현신들의 보좌를 받아 시행한 통치 제도. 천자의 자제이자 가신인 제후들에게 지방의 넓은 영토를 나눠주면서 해당 지역의 통치를 일임했다. 제후들은 분봉받은 지역으로 이주해 가서 천자를 대리해 통치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자제, 가신들인 경대부에게 재분봉하여 그 지역 통치를 맡겼고 겨대부들도 자신의 영지를 자제나 가신인 사에게 재분봉했다. 이 같은 분할 통치 구조 속에 천자-제후-경대부-사-서인의 서열화된 피라미드식 지배 질서가 정착되고, 다섯가지 신분은 각각의 위상과 분수에 맞는 행동규범인 예와 친족간의 윤리규범인 종법제 및 우애 효친 질서를 준수했다.


1. 천자(天子)-본건제도하의 최고 지배자이자 천하강상 질서의 정점에 위치한 주와에 대한 종교적 경칭. 주나라는 하늘로부터 천하 만민을 밝고 공정하게 다스리라는 신성한 명령, 천명을 위임받은 존엄하고 유일한 왕조이며, 주나라 왕은 그러한 소명을 받든 천제의 아들이란 의미다. 원래는 주나라 왕에 대한 독보적인 호칭이었으나 주나라가 멸망하고 진제국이 성립하여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가 등장한 후에도 천자 칭호는 사라지지 않고 병용되었으며, 이후 역대 통일 왕조에서도 황제와 천자가 병칭되었다.


2. 제후(諸侯)-주대의 봉건제도하에서 천자 다음에 위치한 최상층 지배층으로 천자로부터 각지의 넓은 영토를 분봉받아 그를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다스리는 지방 국군 또는 영주들을 통칭하는 말. 또 제후가 통치하는 나라들을 범칭하여 제후국이라 한다. 봉건 제도하에서는 왕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는 천자뿐이며, 지방 군주, 곧 영들인 제후는 일반적으로는 공이나 후, 보다 세분해서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南)의 다섯가지 호칭으로 불렀는데, 이들은 모두 당시의 예제 질서에 따른 작록의 등급이었다. 또한 천자의 가족과 종실은 왕실, 제후의 종실은 공실이라 불렀다.


(1) 공-제후들에게 하사된 5등 작위 중 최상 작위. 예기(禮記)에 의하면 천자는 사방 천리의 영지를 다스리고,5등작의 1위인 공과 2위 후는 사방 100리, 3위 백은 사방 70리, 4위 자아 5위 남은 사방 50리의 영지를 다스린다고 했으나, 이는 후대에 명문화된 내용일뿐 당시 이 같은 규정이 정확히 적용되지는 않았다. 열국지에 빈번히 등장하는 모공의 대다수는 모나라를 통치하는 영주로 1등작을 하사받은 제후를 말한다. 혹 5등작과 무관하게 모든 제후들의 시호도 모공이 대다수다. 왕실에 상주하면서 각종 사무를 맡아보고 그 대가로 왕실직할령일부를 식읍으로 누리던 왕실 직속의 최고 관료들을 칭하기도 함.

(2)후-봉건제후의 작위 중 두 번째 위치의 칭호. 모후는 모나라의 군주인 후작(예 신후는 신나라의 군주이자 후작의 작록을 받은 제후)

(3)백-봉건제후의 작위 중 세 번째 칭호, 모백은 모나라 군주인 백작

(4)자-봉건제후의 작위중 네 번째 칭호, 모자는 모나라의 군주인 자작

(5)남-봉건제후의 작위중 다섯 번째 칭호, 모남은 모나라 군주인 남작(예 허남은 허나라의 군주로서 남작의 작위를 자닌 제후.

(6)부용(附庸)- 세력이 미약한 제후국들을 이르는 말, <예기>에 의하면 영지가 사방 50리를 넘지 못해 5등 제후에 들지 못하는 소국 영주들은 직접 천자에게 조회드리지 못하고 5등 제후에 곁붙여 조회드리게 했으므로 부속하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부용이라 칭하게 되었다. 곧 봉건제적 질서로는 제후와 동급이긴 하나 영토나 세력면에서 독립된 제후 역할을 할 수 없는 소군주 내지 그들이 통치하는 작은 국가들을 일컫는다. 춘추시대에는 진, 초, 진 등

 

21. 경대부(卿大夫)

(1)경: 천자-제후-경대부-사-서인의 봉건질서 속에 이치한 제후의 하급자겸 상층 귀족들 중 일반 대부와 뚜렷이 구별되는 큰 권세와 넓은 영토, 많은 가신과 재력을 지닌 최상급의 대귀족을 지칭하는 말. 일명 상대부(上大夫), 서주 왕실에 상주하면서 각종 왕실 사무를 맡아보고 그 대가로 왕실 직할 영지의 일부분을 록으로 영유하던 왕실 직속의 가재적 고관들 중 공(公) 다음 직급을 칭하기도 했다. <열국지>에서는 경 또는 상대부로 병용됨.

(2)경사(卿士):왕실 직속의 가신, 가재들을 일반적으로 칭하는 말. 이 들 배부분은 기내에 일정 규모의 식읍을 보유하거나 호경근처에 중소 제후국을 거느렸다.

(3)대부(大夫):봉건 제도하에서 제후의 하급자인 일반 상층 귀족들을 범칭하는 신분 용어, 대부분 상당한 영지와 풍부한 재력, 병력 및 가신인 사(士) 피지배층인 서인, 천민들을 거느렸다. 보다많은 인력과 재력, 영토를 거느린 강력한 상급자를 상대부 혹 경, 다소 약소한 재려고 지위를 지닌 자를 하대부라 칭했다.

(4)사(士):봉건제도하의 하층 귀족 겸 소읍의 영주로 경대부의 가신이거나 제후의 말단 신하에 해당함. 지위와 재력 면에서 상상, 중사, 하사 등으로 구별되었다.

 

2권

22. 맹세의식

서주-춘추시대에는 제후국과 제후국간에, 제후와 경대부 간에, 경대부와 사들 간에, 정치, 군사상의 필요로 맹약이 체결될 때마다 맹약내용의 신성성과 엄수성을 보장하고 천지신명의 가호를 빌기 위해 희생을 동원한 맹세의식을 치렀음, 곧 맹약의 쌍방 당사자가 많은 가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입술에 신분 등급별로 규정된 소, 돼지, 양 등 희생의 피를 바르고 정화수에 그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설 나뉘 마시면서 어떤 난관이 있어도 맹약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함. 1965년과 1966년에 중국 산서성 후마시에서는 옥이나 돌에 붉은색으로 맹약의식의 구체적 절차와 내용, 참가 인원 등을 기록한 진나라의 맹서문건(B,C.496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이 발견되어 이 방면의 진귀한 실물 자료가 됨.


23. 승(乘)

서주-춘추시대의 핵심병력인 전차를 세는 단위. 보통 전차 1승에는 말 4필, 귀족군사 10인, 30인이나 72인의 잡역부, 각종 청동제 무기 등이 부속되고 이들을 온전히 갖추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경대부와 사 등 귀족만이 전차를 소유하면서 전쟁을 주도해TRh, 이에 비해 서민들은 토지세나 부역을 통해 전차 유지비 등 전쟁 비용만 부담함. 춘추시대까지의 전쟁은 귀족들 간의 차전과 공성전이 주류였고 성복전(B.C. 632), 언릉전(B.C.575) 등 유명한 대전투들도 하루 만에, 그것도 1차의 접전으로 결판났음. 이로 인해 전쟁의 주력인 전차 부대를 얼마나 보유하고 동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 국력의 척도로 인식되었음. 서주 예제(禮制)하에서는 천자는 만승지국(1만승에 상당하는 병력을 보유한 국가),제후는 천승지국, 대부는 백승지국이라는  등급별 규정이 있었으나 왕실의 쇠락과 제후들의 성장으로 춘추초부터 이 규정은 유명무실하여짐. 일례로 성복전 당시 진, 초 양국은 각각 4,000승을 동원했는데 이는 말 1만 6,000필, 구족군사 4만 명, 노역부12만-29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이었음. 병력의 확대를 춘추시대 제후국들의 경쟁은 갈수록 첨예해졌으며, 차전대신 보병전이 보편화되는 전국시대에는 주요 열강들이 평균 100만의 병력을 보유할 정도가 되었음.


24. 잉첩(媵妾)

서주-춘추시대에 유지된 지배층의 독특한 결혼 풍습. 제후국간에 정식혼례를 치르 때 제후의 적녀와 함께 그 이복 여동생이나 조카딸 등을 함께 딸려 보내 귀첩을 삼게 하여 양국의 우호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동시에 정부인의 말벗이 되게 했음. 따라서 잉첩은 여타의 첩실들에 비해 높은 대우를 받았고 그녀의 소생들도 일반 서자들과는 확연회 구분되면서 적장자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음. 보통은 동일 공실 내에서 서녀나 직계 공녀(제후의 딸)들보다 신분이 다소 낮은 방계 친인척의 딸들을  수명에서 많게는수십명 정도 잉첩으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그 경우 잉첩사이에서도 본래의 신분에 따라 서열 등급이 생기게 마련임). 경우에 따라서는 신부를 보내는 제후국의 부용이거나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는 약소국들 중 동성의 국가들이 공녀와 친인척 딸들을 상국을 위해 잉첩으로 보내기도 했음. 열국 간의 항쟁과 회맹, 반맹 및 그로 인해 파생되는 국가들 간의 지배-피지배 내지 종속관계가 심화되는 춘추 중기 이후에는 이처럼 약소국이 동성의 강대국을 위해 공녀들을 잉첩으로 보내는 사례가 점차 증가하였음. 예컨대 희성인 진나라가 강성의 제나라와 통혼했을 때, 진과 같은 희성인 위나라가 십수명의 잉첩을 진을 위해 보낸 사례가 있었고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춘추죄씨전>에서 적잖게 발견 됨.그 경우 통혼 관계가 얽힌 세나라의 관계는 한동안 안정되는 편임.


25. 초무왕(礎武王)의 칭왕(稱王)

기원전 704년에 초나라 군주 웅통이 주 천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왕을 칭한 사건은 서주 시대의 봉건제도와 그를 지탱하던 예고, 예제 질서가 무너진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봉건 질서하에서는 천자만이 왕을 칭하고 모든 제후들은 공,후,백,자,남 등 5등작 칭호를 사용해야 함). 당시 웅통의 칭왕은 정과 제, 노, 위 등 중원 제후국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실 이것은 초나라가 주 왕실 및 중원 국가들과 거리상으로 상당히 떨어진 비교적 궁벽한 남방지역에 위치했기에 어느 정도 가능했던 일임. 초나라의 칭왕은 춘추시대 초반에 일어난 상당히 예외적인 사건에 속하는 반면, 전국시대 말이 되면 제나 진 등 최대 열강들이 공공연히 왕을 칭하면서 천년 왕국 주나라를 대신한 새로운 천하를 세우고자 했고  기원전 256년에 동주 왕실마저 멸망한 이후에는 그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음.


26. 회맹(會盟)

춘추시대 제후국들 간에 국방, 전쟁, 제후위 계승 등 국가 명운을 좌우할 만한 중대 현안과 관련되어 체결된 맹약을 지칭, 춘추시대에는 국제질서의 변동에 따라 제후국간 빈번한 회맹과 이전의 회맹관계를 깨뜨리는 반맹이 무상하게 반복되었음. 대부분의 회맹은 당사자 국가들의 중간 지점 내지 제3의 장소를 특별히 지정하고 길일을 택해 거행되었는데, 사서에서 확인되는 회맹 장소는 대부분 하천 유역의 구릉지대가 많음. 이는 하신의 신성한 힘을 빌려 회맹의 엄숙성과 영적인 효력을 높이고자 한 고대인들 특유의 정신과 세계관이 반영된 종치였음. 일단 회맹이 체결되면 대상 국가들은 적어도 회맹의 효력이 지속될 동안 군사,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공동운명체가 되어 상호 부조했음. 특히 제환공이나 진문공 등 중원의 패자들은 회맹국가들 간의 협력을 더욱 돈독히 하고 회맹의 의미와 엄숙성을 높이기 위해 일관되게 존왕양이(주 천자를 받들면서 사방 이적들을 물리쳐 중원의 평화를 지키자는 의미), 계절존망(국통이 끊어진 나라들의 국통을 이어주고 멸망한 나라들을 구원하여 다시 복국시킴으로써 천하의 안녕과 봉건제도의 강상질서를 수호하자는 의미) 등 대의 명분을 추구했음. 회맹은 춘추시대의 국제ㅡ름을 좌우한 중대사였기 때문에 <춘추>와 <좌전. 등에는 당시의 주요 회맹과 대상 국가, 연도와 날짜, 장소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7. 고대귀족 여성의 호칭

춘추전국시대에는 평민은 물론 여성들도 이름이 없었음. 다만 귀족 여성에게는 사후 그 신분에 합당한 시호가 내려졌는데, 이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이름이라기보다는 공식적인 직함의 성격을 띠었음. 가장 높은 신분인 제후 정부인의 경우 그 시호는 대개 남편의 시호와 친정 성씨가 한 자씩 합쳐져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였음. 예컨대 위장공의 정부인 장강은 강성인 제나라의 공녀로 위장공에게 시집왔다는 의미임. 정부인 외의 부인이나 첩실들은 평생의 행실이나 성격, 공적에 준하여 시호를 받고 그 뒤에 친정 성씨가 더해지는 형식이 많았음. 또한 일부시호에 들어가는 맹, 백, 중, 숙, 계 등은 공실 내에서의 장유서열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의미였음. 곧 맹(맏이 맹)은 최연장자, 백(맏이 백)과 중(가운데 중)은 그 다음 연장자, 숙(나이 어릴숙)은 연소자, 계(끝, 막내 계)는 말자를 뜻하였음. 예컨대 맹희, 백희, 숙희, 계희 등은 희성의 주 왕실과 동성제후국(노, 정, 진, 연, 채 등) 공실 내의 장녀, 차녀, 삼녀, 말녀를 각각 통칭했음. 이것은 남성들의 호칭이나 시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맹손, 중손, 숙손, 계손, 등은 제후국 공실의 장손, 차남, 삼남, 말자를 각각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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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계절존망(繼絶存亡)

존왕양이(尊王攘夷)와 함께 춘추시대를 지배한 양대 국제질서원리 겸 대의 명분을 지칭하는 말. 국통이 끊어진 나라의 종묘와 국통을 다시 이어주고 멸망한 소국들을 구원하여 복국시켜줌으로써 천하의 안녕과 봉건제도하에서의 강상, 예악질서를 수호하겠다는 의미임. 제환공이 북방 이민족인 적인의 침입을 받아 전국토가 유린되고 백성의 대다수가 도륙된 소국 위나라와 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각각 초구와 이의 에 성을 쌓아 양국의 유민들을 이주시키고 각종 물자와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양국을 복국시킨 사례(B.C.659-658)들이 대표적인 계절존망의 업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전국시대 이후 유력 제후국들 간의 약육강식과 하극상의 전쟁. 정쟁 등이 보편화되면서부터 강대국이 약소국을 봉건제의 대의명분과 강상 윤리에 입각해 혜시하고 보호해 주는 계절존망의 원리는 퇴색되었음.


29. 규구(葵丘)의 회맹(B.C.651)

제환공이 주도한 아홉 차례의 회맹 중 최후이자 가장 규모가 큰 회맹으로 제환공 패업의 완성이자 절정에 해당, 제환공이 중원제후국들의 패자인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는 동시에 천하 모든 제후국들이 힘을 합쳐 존왕양이와 계절존망의 질서를 엄숙하게 준수할 것을 거듭 천명함으로써 패자의 존재 조건과 의무, 등극절차 등을 공식화했음. 춘추시대의 번다한 회맹들 중 그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 면에서 한 세대 뒤에 진문공이 주도한 천토의 회맹(B.C.632)과 비견될 수 있음.


30. 존왕양이(尊王穰夷)

천자인 주왕을 존경하고 보필하며서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 사방 이민족들을 물리쳐 중원의 평화와 질서를 수호하겠다는 의미임. 제환공, 진문공 등 춘추오패들이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미약해진 주왕을 대신하여 제후국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회맹, 반맹 등 복잡 무상한 국제질서를 주동하면서 자신들의 지도력을 봉건제 질서안에서 정당화시키기 위해 내세운 대의명분이었음. 오패의 첫 주자인 제환공이 명재상 관중의 향도하에 처음으로 만천하에 공표한 이후 춘추시대의 핵심적인 치세원리로 굳어져 나머지 4대 패자들도 이를 계승하고 더욱 공고히 했음. 진, 한 등의 통일 제국이 수리된 이후로는 그 의미가 더욱 확대되어 모든 국론과 국력을 한데 모아 황제를 존봉하면서 외세의 침입을 물리침으로써 중화 제국의 문화와 역사를 수호하자는 애국적 이념으로 굳어졌음. 평화로운 때보다는 역대 왕조가 위기를 겪을 때 더욱 힘을 발휘했으며 특히 1839년의 아편 전쟁반발 이래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서양제국주의 열강의 침입과 그로 인한 국난이 계속되는 속에서 절정에 달함.

 

31. 패자(覇者)

서중 왕실의 동천이후 점차 퇴색해가는 주 천자의 존엄과 권위를 대신하여 일반 제후들보다 상좌에 군립하면서 춘추시대의 수다한 제후국들 간의 분쟁과 대립을 조정하고 회맹, 반맹에 의한 국제질서를 주도한 이들을 패자라고 했음. 패자로 추대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나 영토, 전공만으로는 부족하며 왕실을 공경하고 도덕과 예악질서를 솔선해서 수호하는 밝은 덕업과 공명을 만방에 드날림으로써 천하 모든 제후들로 하여금 그를 인정하고 마음으로부터의 외복하도록 해야 함. 춘추오패란 실제 국력면에서나 대의명분 면에서나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켜 당시의 국제회의(회맹)를 통해 (주왕을 대신한)한 시대의 지배자임을 공표 받은 춘추시대의 다섯 강자를 지칭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제나라의 환공(B.C.685-643 재위), 진문공(B.C.636-628 재위), 초나라의 장왕(B.C.613-591 재위), 오나라의 부차(B.C.495-477 재위), 월나라의 구천(B.C.743-701, 재위)  등 5국 군주를 꼽는다. 이 밖에 통천 직후 왕실을 보필한 공을 내세워 한 세대를 잠깐 풍미해TEjs 정나라의 장공(B.C.74-701 재위), 서융지역의 소부락들을 대거 점령해 서방의 소패업을 달성한 진나라의 목공(B.C.659-621 재위) 등을 소패주로 꼽기도 한다. 혹자는 제환공 사후 적극적으로 패업을 추구하다가 좌절당한 송나라의 양공(B.C.650-637 재위)을 들기도 하나 송양공은 여러 면에서 패자의 범주에 넣기에는 부적당한 인물일 것이다.


32. 춘추시대의 국제질서

회맹질서에 의해 지배된 춘추시대까지는 패자로 군림한제. 진, 초 등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정벌해 그 영토를 접수하더라도 구국의 군주와 옛 공족들은 그대로 구토안에 머물러 얼마간의 식읍을 보전하면서 조상 제사를 받드는 종묘주로서의최소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또한 정복한 소국 영토에 대해서도 자국 관료를 파견해 직접 통치를 하기보다는 토착 지배층의 자치를 상당 정도로 용인해주는 간접 통치방법을 많이 활용했다. 이는 춘추시대까지는 서주시대의 봉건질서에 입각한 각 지방의 분권적 분산적지배의유제가 잔존해 있었고 피지배층들도 그러한 질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직접 통치로 이행하는 작업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소국은 대국의 부용내지 속읍이 되어 전쟁이나 내분 등 대사가 있을 때마다 대국에 충성하거나 소용되는 물자, 비용 등을 제공해야 했으며, 이런 의무들을 감독하고 관리한 이들은 여전히 옛 군주와 공족, 귀족들이었다. 곧 소국의 피지배층들은 점령국인 대국 군주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옛 지배층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대국과 소국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말하자면 집단 대 집단의 관계일 뿐 대국 군주가 소국 피지배층들을 온전히 자신의 신민으로 삼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주권은 빼앗겼으되 국통과 종묘는 보존되며 영토의 주인은 바뀌었으되 영민들은 그대로 인 춘추시대 특유의 과도적 통치구조가 정착되게 되었다. 그러나 춘추후기부터는 강대국들이 정복지에 군현을 설치하고 군수 현령을 파견해 직접 지배를 시도하는 한편 구 공족과  구민들을 외지로 강제 추방하여 구국의 의 자취를 말살해버리는 전략을 택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국시대에는 회맹과 계절존망으로 상징되는 간접지배를 극복하고 직접지배의 전형인 군현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정착시키느냐는 것이 각국 부국강병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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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기강지복(紀綱之僕)

최고로 훈련되어 군율과 근본이 꽉 잡힌 정예용사를 의미, 여기서의 복은 종이 아니라 병사 용사 등으로 풀이됨. 진목공이 주유천하 끝에 진나라에 도달한 진 공자 중이를 극진히 예대하고 딸 회영과 혼인시킨 후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마침내 제후위를 획득하게 한 후 회영과 함께 귀국할 때 최고 정예부대 3,000을 주어 호위하게 했다고 함. 여기서 유래된 기강이라는 말은 이후 집안이나 나라를 바로잡는 근본 도리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게 됨.

 

34. 성복(城濮)의 전투(B.C.632)

필의 전투(B.C.597, 언릉의 전투(B.c.575) 등과 함께 춘추시대의 5대전으로 꼽히는 유명한 전투. 주양왕 20년 음력 4월 무진일에 양쪽 군대가 진나라의 변경인 성복에 진지를 구축한 후 다음날인 기사일에 격돌했는데, 결과는 진나라 책사 선진의 기묘한 계책에 말린 초나라의 대패로 끝났음. 이 전쟁의 결과 진나라는 제나라를 계승하여 춘추의 두 번째 패권 국가로 붕상해 일세를 풍미하게 된 반면 초나라는 중원 진출이 좌절된 채 패업을 2-3세대 뒤인 초장왕 시기(B.C.613-591)로 늦출 수밖에 없게 되었음. 곧 중원의 운명과 천하 패권의 향방을 판가름한 가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전투였던 것임. 당시 이 전추에 동원된 양 진영의 군사력은 각각 4,000승, 곧 귀족 군사 4만 명과 노역부 12-29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구성을 보면 진나라 측은 진(晉), 진(秦), 제, 송 등 네 나라의 연합군이었고 초나라 측은 초의 본군과 진(陳), 채, 신, 식 등 부용국에서 징발된 군사들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나라 뿐 아니라 남방 초나라 군사력이나 국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성복전의 승패를 본 소설에서는 초나라의 패배를 사필구정인 것처럼 평가했지만, 시제로는 당시 초나라의 패배는 진나라에 비해 국론이 통합되어 있지 못했던 점, 투씨와 성씨를 비롯한 대귀족들의 강성으로 왕권인 중원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점, 초성왕이 성복전에 대해 지극히 미온적으로 대처했던 점(성득신에게 극히 적은 지원군만 보내주었음) 등을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곧 성복전의 패배는 초나라의 입장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원수 성득신의 책임이지만 초성왕에게도 책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35. 송양지인(宋襄之仁)

송나라 양공이 베푼 그릇된 인의(仁義)라는 의미, B.C.638년에 송나라의 양공은 송, 위, 허 등의 네 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반드는 정나라를 공격했고 그를 구원하러 온 초나라 군대와 홍양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음. 이때 송양공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초나라 군사가 홍수를 건너기 전에 기습 공격을 해야 승산이 있다는 대사마 자어의 권고를 뿌리치고 인의를 그릇되게 앞세워 초군이 홍수를 건너와 군진을 치고 대오를 모두 정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공격해 대패했음. 패배 후 송양공은 반년 만에 전투 중간에 입은 다리 부상으로 사망했고 송나라 사름들은 두고두고 어리석은 송양지인을 비웃었다고 함. 전하여 이성적인 판단 없이 경우에 어긋나게 베푸는 무용하고 어리석은 인의를 칭하게 되었음. 실제로 송양공은 자신이 개최한 소국들 간의 회맹에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약소한 증나라 군주를 처형하여 수신제사의 인간 희생으로 썼을 정도로 무자비한 행동을 하기도 했음. 곧 강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반면 약자에게는 무자비한 비굴하고도 이중 인격적인 면모를 지녔음.


36. 천토의 회맹(B.C.632)

제환공이 소집한 규구의 회맹(B.C.651)과 더불어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희맹으로 꼽힘, 진문공이 진(晉), 진(秦), 제, 송의 네 나라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변경인 성복에서 성득신이 이끈 초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직후, 남만의 나라인 초나라를 물리쳐 중원의 평화를 지키고 주 왕실을 보필한 혁혁한 공로에 대한 대가로 드디어 주양왕으로부터 패자의 존호를 받고 모든 제후들로부터 그를 인정받은 기념비적인 국제 회의였음. 규구의 회맹과 마찬기지로 이 회의를 통해서도 제후들은 2대 패자인 진문공을 중심으로 존왕양이와 계절존망의 정신을 준수하면서 서로 화합하여 중화세계의 질서와 안녕을 힘써 수호할 것을 맹세했음.


37. 한식절(寒食節)

진문공의 주유천하를 시종일관 수행했던 충신 개자추는 진문공이 즉위한 뒤 시행된 논공행상을 구차스럽다고 피해 깊은 산속으로 도망갔음. 진문공이 그를 찾아내기 위해 산불을 질렀는데도 개자추는 끝내 절개를 지켜 산속에서 불타 죽었고, 그르 기리기 위해 그가 불타 죽은 음력 3월 초 닷새날(청명절이기도 함)에 민간에서는 일체 화식(火食)을 금하고 마른 음식만을 먹는 풍습이 생겼음. 이것이 오늘날의 한식절의 유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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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방백(方伯)

지방의 강력한 영주라는 뜻으로 패자와 동의어, 패업과 백업도 동의어로 사용됨, 이 경우의 백은 제후의 5등작중 3등작을 지칭하는 호칭이 아니라 봉건 제도하에서 천자의 아래에 위치하면서 각자의 넓은 영토를 분봉 받아 해당지역을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지방제후, 곧 영주들을 널리 통칭하는 용어, 일반 백들보다도 훨씬 우월하고 압도적인 위치에서 서서 천자를 대리해 각지의 수다한 백들을 영도하고 이끄는 지방 실력자를 지시하는 용어.


39. 삼황오제(三皇五帝)

중국 상고시대의 신화적 성군들을 총칭하는 말로 중국 역사의 기원이 되는 태고의 신비로운 시대 내지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사용됨. 삼황은 복희씨, 수인씨, 신농씨, 혹은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의 3성군이고, 오제는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5성군임.수인씨 대신에 축융씨나 여와씨를 꼽기도 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반인반수의 상서로운 외모를 지녔다고 함. 복희씨는 백성들에게 어렵과 목축을 가르치고 팔괘를 만들었고, 수인씨는 화식하는 방법을  신농씨는 농경과 교역을 가르쳤다고 함. 또 오제 중의 첫째인 황제는 배와 수레 만드는 법, 집 짓는 법, 옷감 짜는 법, 약초 이용법 등을 가르치고 문자와 악기를 발명했으며 중원의 다수 부족장들을 통합한 최초의 부족 국구를 건립했기 때문에 중국 민족(華夏族)의 시조이자 문명의 개조로 숭앙됨.


40. 여화씨(女와氏)

본 소설처럼 수인씨 대신 여와씨를 삼황에 넣는 것은 북방에 비해 모계 사회의 전통이 강했던 남부 중국계통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함. 여와씨는 복희씨와 남매 사이로 대홍수를 극복한 뒤 서로 혼인하여 많은 자손을 퍼뜨렸다고 전해짐. 여기에서 보이는 대홍수 설화와 남매혼 신화의 구조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나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대홍수 설화, 그리스 신화의 우라누스-가이아, 크로노스-레아, 베우스-헤라로 이어지는 남매혼 신화들과 사뭇 유사한 측면이 있음. 이를 통해서 선사시대 인류의 동서를 초월한 공통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들을 짐작할 수 있음.


41. 구정(九鼎)

일명 구령신정(九龍神鼎) 하나라의 시조 우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9개의 보정(정은 금속으로 만든  발이 셋, 귀가 둘 달린 크고 귀한 솥). 우왕이 순임금의 명을 받들어ㅓ 황하의 치수에 성공한 후 천하를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각 주의 특산에 따른 공부(각 지역에서 국가에 바치는 특별한 진상품)를 정해주어 통치의 자원으로 삼게 했음(이것이 바로 유명한 우공구주(禹貢九州)이다. 우공구주는 형(荊), 양(梁), 옹(雍), 예(豫), 서(徐), 양(揚), 청(靑), 연(兗), 기(冀)의 9주를 의미한다. 이때 우왕의 성덕에 감읍한 구주의 수장들이 각 주의 진귀한 금속을 모아 바쳤고 우왕은 이를 재료로 삼아 9개의 정을 차례로 제작해 대대로 왕위 전승의 보기로 삼게 했다고 함.

이후부터 정은 국가, 국통, 왕위, 제업 등을 상징하는 말로 두루 쓰이게 되었고, 구정은 하나라를 거쳐 바로 천하를 다스릴 만한 덕업과 공명 및 정통성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상징함.

 

42. 문정(問鼎)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정의 크기를 묻다’가 됨. 중원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은 초나라의 장왕(B.C.613-591 재위)이 B.C. 606년에 육혼융을 정벌하는 대공을 수립한 후 내친김에

낙수(주나라를 흐르는 중요 하천, 흔히  서주 문명의 발상지이자 상징으로 여겨짐). 유역의 주나라 국경 근처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해 초나라의 국력과 위엄을 만방에 과시한 후  주정왕의 사신으로 참석한 왕손 만(양왕의 손자)에게 하나라의 우왕이 만들고 상나라를 거쳐 주왕실로 전해졌다고 하는 전설상의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고 함. 이 말을 통해 장왕은 자신이 구정을 대신 차지해보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음. 이에 왕손 만은 왕조의 조명과 국가의 안태는 왕도와 덕업에 달려 있지, 한낱 정의 무게나 크기에 있지 않다는, 조용하지만 매서운 말로 엄하게 꾸짖어 장왕을 뜨끔하게 만들었음.


43. 필주(筆誅)

자의(字意)로 해석하면 ‘붓으로써(상)벌을 내린다. 는 의미 현실에서는 반드시 원칙대로만 관철되지 않는 인간사의 정도와 정의, 시비와 흑백을 올바로 규명하고 그를 사서 기록을 통해 미화나 윤색없이 분명히 밝힘으로써 대대로 후인이 귀감과 경계를 삼게 하려는 중국 특유의 역사의식을 압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 곧 사관은 투철한 사명의식에 입각해 당대  사실을 왜곡없이, 특히 현실적인 권력의 위협과 회유에 굴복하는 일 없이 정직하게 직필함으로써 선악과 인과응보의 대 섭리를 역사서를 통해서나마 관철시키고자 하는 기사의 대원칙임. 이것은 또한 개개의 인간 행위들을 하늘을 대신해 재단하고 합당한 상벌을 중므로써 현세에서는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는 종과득과(種瓜得瓜), 종두득두(種豆得豆)(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의 원리를 사서에서만큼은 모두에게 공명정대하게 적용시켜 자신이 저지를 행위의 업보와 그에 대한 후세의 엄정한 평가를 스스로 책임지게 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음. 곧 군주를 시역하거나 불효의 대죄를 범하고도 당대에는 천벌을 받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도 사서에서는 난식적자의 악명과 그에 대한 신랄한 비난, 치죄를 피할 수 없게 하고, 반대로 시종 충정과 절개를 지키고 의행만을 실천했지만 때를 잘못 만나 갖은 고생을 겪거나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이들도 사서를 통해 그 덕업에 합당한 대우나 예찬을 받고 복권되게 함으로써, 생전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상벌을 지면을 통해 정확히 내리고자 했던것, 곧 역사를 기록하는 붓을 통해 악인은 생전에 못 받은 벌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도록ㄱ 함으로써 인도와 천도의 공평무사함을 발양하고자 했던 것, 필주의 가장 대표적인 2대 사례로 꼽히는 진나라 태사 동호의 일화와 제나라 태사 형제들의 순직 일화는 후세의 중국인들에게 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가장 근본적이고 정신적인 힘의 원천이 되어 왔음.


44. 약오씨(若敖氏)난(亂)

초나라의 최고 귀족인 약오씨들이 B.C.605년(초장왕 9년)에 일으킨 춘추시대 초나라의 최대 규모의 내란, 약오씨란 초나라의 14대 군주인 약오(B.C.790-764 재위. 약오는 일종의 시호, 초나라에서는 무왕이 B.C. 704년에 창왕하기 전까지 다수 군주에게 종종 ‘오’가 붙은 시호를 올렸음. 오는 추장, 추호 등을 뜻함) 웅의 직계 자손들인 유력 세경가를 뜻하는 말로 투씨, 성씨 양 가문을 함께 지칭함. 양 가문 중 좀 더 많은 실권을 지녀왔던 투씨가 장왕이 즉위한 이후 굴씨, 위씨 등  다른 가문들을 중용하는 데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국정권을 지키기 위해 장왕 - 위씨 연합세력을 선제공격해 난을 일으킨 사건, 이 난이 약오씨(투씨, 성씨)의 몰락과 장왕측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초나라의 내정이 안정되고 왕권도 대폭 강화되어 그것이 바로 부국강병과 패업으로 직결되었음.


45. 신선사상(神仙思想)

진목공(秦穆公)(B.C.650-621 재위)의 딸 농옥과 그 부군인 소사(통소와 생황의 달인이었다고 함)가 속세의 부귀영활를 초탈한 채 음풍농월하면서 청정하게 살다가 어느 날 신선이 되어 봉황과 용을 타고 승천햇다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상주시대에는 육신이 죽은 다음 혼백이 승천하여 가게 된다는 청정무위한 신선의 세계와 선계의 불로장생을 동경하고 그를 적극 추구하는 신선사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각지에서 발견된 묘지 부장품들과 각종 기물들을 통해서도 원시적인 신선사상을 표헌한 그름들을 적잖게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사주 시대의 신선사상은 불교의 윤회관념이 전래되기 이전의 중국의전통적인 내세관을 반영하기도 했다. 특히 동방연해 지역에 위치했던 제나라와 장강 유역의 온난한 남방지역에 위치한 초나라에서 신성사상이 성행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래서 두 지역에서는 신선사상과 관련된 그림, 벽화, 유물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발견된다.


6권

46. 결초보은(結草報恩)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 진문공(晉文公)(B.C.636-628 재위)의 주유천하를 보필한 충신 위주에게는 조희라는 애첩이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틈틈이 장남 위과에게 자신이 죽으면 첩을 좋은 혼처로 개가시키라고 당부했음. 그러나 임종 시 정신이 혼미해지자 정반대로 그녀를 순장하라고 명했는데, 위과는 부친이 생전에 정신이 맑았을 때 하던 말씀을 중시해 서모를 개가시켰음, 후에 위과가 진나라와의 전투(B.C.593)에 출전하여 진의 용장 두회에게 밀려 고전하고 있을 때 서모 부친의 혼령이 나타나 두회의 발을 풀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 그를 손쉽게 사로잡고 대승을 거두게 도와주었음. 곧 위과가 베푼 음덕에 감읍한 친정아버지가 귀하게 되어 결국 전국시대에 위나라의 군주가 됨.


47. 언릉(鄢陵)전투

(B.C.575년에 초(礎), 정(鄭)연합군과 진(晉)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대전투이자 춘추5대전 중의 하나. 장왕(莊王)(B.C.613-591 재위) 사후 초나라의 패권이 다소 둔화되는 틈을 타 진나라가 서서히 부흥하는 과정에서 진, 초 양 강대국의 갈등이 점차 고조된 결과, 마침내 양국 군대가 정, 송, 위, 진 등 중원의 주요 중소 국가들에 대한 지배력을 놓고 언릉에서 격돌한 전투, 이 전투에서 초나라가 준비 부족과 적군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인해 패배함으로써 진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다시 높아졌음.


48. 필(邲)의 전투

B.C.5597년(초장왕 17년)에 필 땅에서 벌어진 진과 초의 대전투이자 춘추5대전중의 하나, 이 전쟁에서 초나라가 진나라를 대파함으로써 진문공(B.C.636-628 재위),사후 양공(B.C.627-621 재위) 영공(B.C.620-607년 재위), 성공(B.C.606-600)의 3대 치세 동안 명목상이나마 겨우 패권을 유지하던 진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추락하고, 초나라가 제와 진을 이어 춘추시대의 세 번째 패업을 달성하게 되었음.


7권

49. 상하기수(上下箕手)

B.C 547년에 초나라와 진나라가 함께 정나라를 침입하여 성균에서 전투를 벌였을 당시 초나라 군사가 정나라 장수 황힐을 생포하게 되자 초나라 장군 천봉술과 공자 위((훗날의 영왕)가 서로 자신의 공을 다투었음. 실제 황힐을 체포하는 데는 천봉술의 공이 더 많았으나 공자 위는 자신의 위세를 이용해서 억지주장을 했던 것. 이에 중재로 나선 백주리는 포로 당사자에게 물어보자고 하면서도 공평히 판결하지 않고  다분히 공자위에게 아부하는 의미에서 황힐에게 손을 위로 들어 공자 위르 f가리키고 손을 아래로 들어 천봉술을 가리키면서 어느 쪽이 자신을 생포했냐고 교묘하게 물었음. 사태를 재빠르게 눈치 챈 황힐은 공자 위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말을 해 천봉술을 노하게 했는데. 이로부터 사정에 얽매여 잘못인줄 알면서도 억지로 일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거나 불공평하게 처리하는 것을 지시하는 말로 쓰이게 됨.


50. 장화궁(章華宮)

초나라 영왕이 B.C.535년을 전후해 완성했다고 하는 별궁. 실제 정확한 축조 연대는 불분명하나 공식 역사기록인 <좌전>에 장화궁에 얽힌 일화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 무렵에는 이미 장화궁이 완성되어 있었던 듯함. 외국의 망명자들을 수용한(아마도 초나라에 귀화시키거나 포섭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망명자들을 집단 거주시키고 우대해준 듯함) 특수 궁전이었다고 하나 본 소설에서는 영왕이 환락을 즐기기 위해 축조한 것처럼 폄하해서 묘사했음. 특히 허리 가는 여자들을 이 궁전에 많이 모아 놓았기 때문에 세칭 세요궁(細腰宮)이라고도 했는데 이처럼 왕이 허리 가는 여자들을 좋아하자 초나라 도성 안에 허리를 가늘게 하려다 굶어 죽는 여자들이 속출했다고 함.


8권

51. 삼환씨(三桓氏)의 전정(專政)

노나라의 삼환씨(노환공의 세 아들인 경보, 숙아, 계우의 후계자 가문인 맹손, 숙손, 계손씨의 3가를 지칭함) 정립(대등한 실력을 가춘 3자가 솥은 세 발처럼 서로 버티고 서서 겨루는 형세) 상황은 노희공(B.C.659~627 재위) 초년에 공자 경보의 난을 삼환씨를 각각 성읍(맹손씨), 후읍(숙손씨) 비읍(계손씨)에 분봉해주면서 그 단서가 시작되었음. 이후 삼환씨 세력이 계속 강성해진 결과 소공(B.C.541~510 재위) 시기에는 노나라의주인인 소공이 삼환씨의 하나인 계손씨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음, 이어 정공(B.C.509~495 재위), 애공(B.C.494~467 재위) 시기에는 삼환씨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신들까지도 강성해져 삼횐씨 조차 능히 제어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서 노나라 공실의 위업은 땅에 떨어지고 노나라 안에서의 하극상의 풍조도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음. 그 결과 B.C.502년에는 계손씨의 가신인 양호가 계손씨의 영읍인 비음을 장악하고 난을 일으켜 삼환씨 전체에 도전하는가 하면, 삼횐씨들 역시 주군인 소공, 애공을 추방하고 심지어 애공을 타국에서 객사하게까지 몰아감으로써 노나라의 국론 분열과 국력낭비는 점차 심각한 국면이 되었음, 이러한 삼환씨의 전횡과 발호 결과 노나라는 2~3류의 약소국가로 전락하여 전국시대 이후 제나라의 부용처럼 되었다가 전국 말기인 B.C.256년에 초나라에 멸국당했음.


52. 소왕(素王)

대성현 공자의 모친 안징재가 공자를 회임한 중에 태몽을 꾸었는데 태몽 속에 기린(성인이 출현할 전조로 나타난다는 상상속의 신령한 동물,m 생명이 있는 것은 밟지도 먹지도 않는다 고 함)이 나타나 쇠약해진 w나라 왕실을 계승하여 소왕, 곧 왕위는 없으나 왕자나 다름ㅇ벗는 존재가 되리라는 글귀가 씌어진 옥척(玉尺)을 토했다고 함. 이 태몽으로부터 유래되어 소왕은 공자와 같이 제왕의 지위에 직접 오르지는 않았으나 제왕 못지않은 영향을 후세에 남긴 성현들을 지시하는 명칭으로 굳어졌음. 보통 유가에서는 공자를 도가에서는 노자를 소왕이라고 칭하면서 숭상하고 있음.


53. 손자병법(孫子兵法)

춘추시대 오나라 출신의 천재 병법가이자 전략가인 손무(孫武)가 지은 대표적인 병법서, 1편(始計), 2편(作戰), 3편(謀功), 4편(軍形), 5편(兵勢), 6편(虛實), 7편(軍爭), 8편(九變), 9편(行軍), 10편(地形), 11편(就地), 12편(火攻), 13편(用間) 등 총 13편의 구성을 통해 군사 운용의 기본적인 원칙으로부터 실전에 응용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전술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내용들을 심도 있게 다루어 오늘날까지도 중국 병가사상의 진수를 담은 책으로 널리 애독되고 있음.


54. 의협(義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충심으로 섬기거나, 목표 혹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뿐 아니라 처자의 목숨까지도 그야말로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의기와 용기를 지닌 이들, 혹은 그러한 의기로 투합된 인간관계 질서를 지칭하는 말, 특히 춘추시대 후기 오나라에서 그러한 일화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중 전제(일명 전설제)와 요이의 고사가 대표적,


55. 투금뢰(投金瀨)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후 부친 오사와 형 오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로 도망가던 도중 한 빨래하는 처녀에게 밥을 얻어먹었음. 밥을 다 먹은 후 그녀에게  자신을 보았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자 처녀는 자신의 충정을 몰라주는 것을 야속ㅎ해하고 이미 정절을 더럽혔다고 슬퍼하면서 뇌수에 몸을 던져 죽음. 먼 훗날 초나라를 초토화하고 부형의 원수를 갚은 뒤 오나라로 회군하던 도중 오자서는 노수 가에서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천금을 뇌수에 하사함. 후에 그 소식을 들은 그녀의 모친이 천금을 꺼내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짐. 그후부터 오자서가 빨래하는 처녀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천금을 던진 곳을 투금뢰라고 부르게 되었음.


56. 오월(吳越)지역의 제철 산업

춘추시대 후반기에 장강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급성장한 오, 월 양국에 관한 역사기록은 군사와 전쟁에 관련된 내용들이 압도적이며, 그중 제철과 병기 산업의 발전 과정을 다룬 전설이나 고사의  비중이 또한 적지 않은 편이다. 8권에 수록된 간장과 막야 부부의 보검 전설이나 오홍과 호계 형제의 피를 섞어 만든 금구의 전설 등은 그 중 특히 유명하며, 이 밖에도 제철산업과 무기 제작의 발달상을 반영하는 유사한 내용의 전설, 일화들이 상당히 많이 전해진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 고사를 아래에서 정리했다. 일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의 2대 제철업 중심지로는 산동의 제나라와 강소, 절강 등지의 오월 지역을 꼽는데 그 중에서도 오월의 검 제작기슬은 천하일품이었다고 한다. 오늘 날에도 고고 발굴을 통해, 오월지역에서 제작된 단단하고 아름다운 검과 극 등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간장(干將)과 막야(莫釾)의 보검(寶劍)

오나라의 제철 명장인 간장과 막야 부부가 오나라를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오왕 합려의 뜻에 따라 차출되어 천하 명검을 만들도록 명령받자 자신들의 머리털고 손톱을 뜯어 넣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영혼이 담긴 한 쌍의 검을 만들었다고 함. 한 쌍의 검은 그들 부부의 이름을 따서  각각 막야, 간장 검으로 불렸는데 후에 양검이 모두 용으로 변하여 승천했다고 함.

<검지>

간장과 막야 부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에 의해 만들어진 후 약 600여 년 동안이나 멀리 떨어져 있던 막야 검과 간장 검이 마침내 서진시대(A.D.265~316)에 하늘의 뜻에 의해 합쳐져서 두 마리의 용으로 화하여 승천했다고 하는 전설이 얽힌 연못.

<구자야의 다섯 보검>

오나라의 명장 구자야가 월나라 왕에게 초빙되어 제작했다고 하는 다섯 자루의 천하명검 월왕은 그 중 세 자루를 오왕 합려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세 자루란 어장, 반영, 잠로를 가리킴, 이 들 중 어장은 전제가 오왕 요를 시해할 때 사용되었고, 반영은 오왕 합려가 딸 승옥을 장례지낼 때 부장품으로 넣어주었다고 하며, 잠로는 하늘의 섭리에 의해 초소왕에게 하사되었다고 함. 세 자루의 칼에 대한 내용은 물론 전설이지만 춘추시대 말기에 오월지역에서 철기 공법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많은 보검들이 대량 생산되어 전쟁이나 교역 등을 통해 초나라는 물론 중원 각지로 전파된 사실은 오늘날의 고고 발굴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음.

<오홍과 호계의 금구>

오나라의 한 장인이 자신의 두 아들인 오홍과 호계를 죽여 그 피를 섞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황금 갈고리.

<시검석(試劍石)

오왕 합려가 천하의 명장 간장과 막야 보검을 하사 받은 직후 칼의 성능을 시험해보았다고 하는 돌. 간장은 쌍을 만든 검 중 여성검 막야만을 합려에게 바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남성검 간장을 몰래 보관했는데, 후에 그 사실이 알려져 합려가 검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간장검은 청룡으로 변했고 간장은 그를 타고 승천하여 검선이 되었다고 함. 막야의 보검은 그 후 600여 년 뒤인 진(晉)A.D.265~317) 왕조 시대에 발견되었다고 함.


9권

57. 고소대(姑蘇臺)

오왕 합려가 축조한 아름다운 누대, 그 아들인 오왕 부차는 월나라를 대패시켜 장강 하류 지역에 대한 패권을 차지하고 중원 제후국들도 무시할 수 없는 강국으로 오나라를 발전시킨 뒤 자신의 공적에 스스로 도취되고 자만과 안일에 빠져 고소대를 유락의 장소로 즐겨 사용했음. 측히 절세미인 서시를 얻은 뒤에는 자주 이 고소대를 행차하여 환락을 즐겼다고 함. 오나라에서 받은 치욕을 설치하기 위해 와신상담한 월왕 구천에 의해 오나라가 멸망하고 부차도 죽은 뒤에는 흥망성쇠의 무상함과 인간사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인식되었음.

고소는 오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강소성 소주시의 별칭으로 오늘 날까지도 간혹 사용되는데, 고소대는 워낙 빼어난 절경으로 인해 유명한 관광 명소로 꼽힘.


58. 향섭랑(響屧廊)

섭(屧)-나무로 만든 날렵하게 만든 신발, 섭을 내딛는 음향이 들려오는 복도라는 의미, 와왕 부차가 총희이자 절세의 미인인 서시를 위해 특별히 고안해 제작하게 한 복도였음. 곧 땅을 파서 큰 독을 줄지어 반쯤 묻고 그 위에 두터운 양탄자를 깔아  서시와 궁녀들이 복도를 걸을 때만다 나무 신발의 걸음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게 만든 기묘하고도 한껏 풍류를 살린 복도였다고 함. 오늘날 영암사 원조탑 앞에 남아 있는 비스듬한 복도가 그 흔적으로 추정됨.


10권

59. 전국(戰國)시대(B.C.453-221)

B.C.453년에는 진(晉)나라의제후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한 틈을 타 3경(卿)인 한호(韓虎-한강자:B.C.?~425), 위구(魏駒-위환자:B.C.?~446). 조맹(趙孟-조무휼,조양자:B.C.475~425)이 당시 진의 최대 실권자이자 치대의 영토를 보유한 지백(知伯) 요(瑤) 지양자)를 죽이고 지씨 일문을 멸문시킨 다음 그 영토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사실상 진나라를 삼분하고 단일 국가로 독립(진의 삼분, 삼진(三晉)의 성립)하는 대단히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했음. 이때부터 3가는 각지의 영읍을 근거지로 삼아 각자 관료제도와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제후나 다름없이 행세했고 그로부터 50년 뒤인 B.C.403년에는 그 아들과 손자들인 한건(B.C.408-400 재위), 위사(B.C.445~396 재위), 조적(B.C.408~387 재위)이 주 위열왕(B.C.425~402 재위)으로부터 제후지위를 정식으로 승인받게 되었음. 이 사건은 주왕실에 의해 제정된 천자-제후-경대부-사의 봉건적 위계 잘서와 종법, 예악제도의원리가 그런대로 명목을 유지하는 가운데 각 지방 제후들이 계절존망과 존왕양이의 원칙 아래 인륜오상과 대의명분을 존중하면서 처신하던 춘추시대 특유의 통치 질서가 이제 더 이상 관철되지 못하게 된 상황이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음. 즉 힘과 실력만 갖췄다면 하급자라도 자신의 상급자이자 주권을 제거하고 그 지위를 차지해도 상관없다는 하극상의 논리와, 강대국이 약소국을 거리낌 없이 병탄하여 자국 영토의 일부(곧 군현)로 만들어버리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힘겨루기가 보편화되는 단서를 열었다고 할 수 있음. 따라서 이처럼 획기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진의 삼분(B.C.453)을 기준으로 보통 그 이전을 춘추시대 그 이후를 전국시대로 구분하고 있음(일부에서는 한, 위, 조가 주 천자에게 제후로서의 지위를 공식 승인받는 B.C.403년을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나, B.C.403년 설은 다분히 명분을 중시하는 역사인식 쪽에 가까우며, 역사 사실자체를 중시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B.C. 453년이 춘추와 전국을 나누는 정확한 연고가 될 것이다). ‘전국(戰國)’이라는 시대 용어는 한 대(漢代)에 유향(劉向)이 편찬한 <戰國策>. 이라는 저서(이 시대의 유명 유세가와 외교가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주요열강들의 항쟁과 외교전 상황을 상세하게 정리한 책)의 제목에서 따온 것임.<전국책>이라는 저서가 해당시대 각 열국들의 항쟁과 하극상 정변, 약육강식의 겸병 전쟁 등을 실감나게 잘 그리고 있듯이, ‘전국’이라는 시대 용어 역시 주요 열강들이 부국강병을 도모하면서 상호 각축하는 가운데 천하통일을 추구해 가는 과정을 매우 함축적이고 적절하게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음. 실제로 약230여 년 간 의 전국시대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다방면에서 역동적인 변혁들이 진행된 결과, 춘추시대 이전의 분산적, 분권적인 봉건지배와 읍제 국가(각 지역에 점과 점으로 분산되어 존재하는 폐쇄적, 고립적인 대소의 읍의 느슨한 연합체로 이루어진 국가체제)의 영서한 구조는 자취를 감추고, 강력한 전제 군주의 일원적, 직할적 지배가 충분히 관철되는 집권화 된 영역 국가와 군현관료지배가 새롭게 전착됨으로써 이후의 황제 제민지배체제의 원형을 마련하게 되었음. 이때에는 인문적 합리적 세계관이 자리 잡게 되었음. 이처럼 본질적, 획기적인 여러 변혁들이 동 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전국시대는  중국 사상 유례없는 중대 전환기라고 할 수 있음. 전국칠웅은 전국시대에 천하의 패권을 다툰 7대 열강을 지칭하는 말로, 한(韓), 위(魏), 조(趙), 제(濟), 초(楚), 연(燕), 진(秦)의 7국을 가리킴.


11권

60. 양사(養士)

선비를 부양한다는 의미, 실력과 힘으로 승부하던 전국시대에는 재력과 군사력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인망과 지지를 얻어 자신의 세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음. 특히 학식과 교양을 갖춘 선비계층의 신뢰를 얻는 다는 것은 천그보다 중요한 일로 인식되어, 각국의 유력 공족들과 대신들은 자신의 문하에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어진 선비들을 많이 모아 그들을 부양하고 공경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음. 이처럼 전국시대에는 주군으 재량과 능력에 따라 크고 작은 규모로 선비를 부양하고 동고동락하는 양사의 풍조가 보편적으로 성행했는데, 이는 단순히 문화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실리적인 목표도 중요하게 작용되었음. 특히 전국 사군자로 칭송되는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초나라의 춘신군(춘신군) 등은 평생 수천 명의 문객, 빈객들을 길러 양사의 대표적인 인사로 꼽힘. 전국시대 말의 대사업가 여불위(呂不韋)도 진장양왕(B.C.249-247 재위)의 즉위를 계기로 진나라의 정권과 재부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게 된 후에는 진나라의 문화, 학술 수준을 천하에 과시하기 위해 전국 사군자들의 사적을 본받아 수천 명에 달하는 문객들을 양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천하고금의 치적과 목민의 문제를 심도 있게 토론하게 하여 그 성과를 <여씨춘추>라는 책으로 집대성하기도 했음.


61. 전국사군자(四君子)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문 대족의 종주인자, 널리 인재들을 우대하고 선비들을 공경하면서 대규로 양사한 것으로 이름을 날린 4인의 군자를 지칭하는 말. 곧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을 가리킴.


62. 합종(合縱)과 연형(連형)

전국시대 중기 이후 본격화, 가시화된 전국칠웅간의 치열한 외교 전쟁을 압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 열국간의 외교전을 이처럼 치열하게 만든 가장 직접적인 동인은 바로 진의 성장이었음. 곧 상앙변볍(商鞅變法)을 통해 빠른 시일에 부국강병을 달성함으로써 서쪽 변방의 이류 국가에서 일약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초일류의 군사대국으로 급성장한 진은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전국 중 후기부터 적극적으로 동진을 추진했음, 이러한 진의 동진 태세에 위협을 느낀 한(韓), 위(魏), 조(趙), 제(濟), 초(楚), 연(燕)의 6국은 분분학 외교정책을 수립하여 진의 막강한 군사적 위협을 피하고자 햇음. 그 결과제시된 것이 합종과 연형으로, 전자는 진의 동쪽에 있는 여섯 나라가 북쪽이 연에서 남쪽의 초에 이르기까지 종으로 연합해 공수동맹을 맺음으로써 진나라를 물리쳐야 한다는 정책론이고, 후자는 6국이 각각 개별적으로 진과 동맹함으로써 다른 제후국을 제압하고 자국에 대한 진이 공격을 유보시키려는 내용의 정책론임. 합족책을 최초로 주장하고 성립시킨 사람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인데, 그의 노력으로 B.C.333년 무렵에 최초의 6국 합종이 체결되었다고 함. 그러나 이합종은 6국의 이해관계가 처음부터 다르고 국내외 사정도 상이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B.C.318년 무렵에 와해되었음. 연형책을 주장한 사람은 진나라의 탁월한 정치가인 장의(張儀)로 연형책 자체가 성격상 합종보다 훨씬 더 큰 안정성, 효율성을 지니는데다 장의의 뛰어난 능력과 수완 덕분에 계속 성공을 거둠으로써 진나라의통일을 기본적인 밑거름이 되었음.


12권

63. 한비자(韓非子)

전국 말의 대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한나라 공자 한비가 자신의 법가 사상을 계통적으로 정리하여 저술한 책. 이 책을 통해 한비자는 전국시대에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법가 이론들을 집대성함으로써 법가 사상의 큰 체계를 수립했음, <한비자>에 나타나 있는 전국 말의 법가 삿ㅇ은 법(法), 세(勢) 술(術)의 3대 요소로 구성되는데, 우선 신불해(B.C.440

~337)로부터 유래된 술은 군주의 관료 통제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공개적인 것이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흉중 속에 깊이 감추어둔  채 수시로 생사여탈권을 발휘하여 신하를 꼼짝 못하게 통제하는 기술이며, 이를 위해 군주는 매사에 희로애락을 감추고 냉철하게 청정무위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곧 술이란 군주의 관료통어술 겸 관교 제도의 운영 원리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임, 다음으로 상앙(商鞅-B.C.390~338)이 주창한 법이란 민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이자 통치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기본 장치인 성문법을 지시하는 것으로, 모든 성문법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고 했음, 당시 상당수의 법가들은 이처럼 무차별적인 성문법의 적용과 준수 및 극단적인 법치주의를 중요 수단인 군주의위세의 중요성을 지시하는 용어로, 군주의 도덕성보다는 법, 세, 술 이론을 종합하여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전국 말의 대법가인 한비자였으며, 그가 3대 요소로 총합한 결과로 수립한 제왕의 학을 차분하게 정리한 것이 바로 명저 중의 명저 <한비자>임,  한비자는 사상가일 뿐 아니라 워낙에 날카롭고 논리적인 명문장으로도 유명하여 진시황이 <한비자>를 읽어보고 감동하여 흠모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짐, 또한 <한비자>는 진제국시대 뿐 아니라 후대에도 계속해서 법치주의의 고전이자 제왕학의 선구로 자리 잡게 되었음.

 

- 끝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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