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열국지 등장 인물

운학처사 2009. 4. 30. 15:03

열국지 등장인물(220)


열국지에 대한 애정이 있어 등장인물에 대해 정리를 하여 보았습니다. 많은 참고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는 동주열국지를 참고로 하였으며 순서는 권별로 12권으로 되었습니다. 김구용 옮김, 풍몽룡 지음, 솔출판사


순서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1

강씨

14

곡옥장백

26

계우

37

개자추

48

동호

58

공자영제

2

공부가

15

관이오

27

건숙

38

선진

49

맹영

59

굴무

3

석작

16

문강

28

공손지

39

성득신

50

선진

60

도안가

4

주선왕

17

선강

29

백리해

40

송양공

51

손숙오

61

양유기

5

소공

18

애강

30

순식

41

제강

52

영유

62

위강

6

송상공

19

위선공

31

여희

42

주양왕

53

조돈

63

진도공

7

영고숙

20

제환공

32

이극

43

진문공

54

진목공

64

초공왕

8

주유왕

21

진무공

33

제환공

44

태숙

55

투월초

65

초장왕

9

정백굴돌

22

진헌공

34

진목공

45

호돌

56

초목왕

66

하징서

10

정장공

23

투곡오도

35

진혜왕

46

호모,호언

57

초장왕

67

하희

11

제족

24

초문왕

36

초성공

47

회부기

 

 

 

 

12

주공

25

포숙아

 

 

 

 

 

 

 

 

13

주환왕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68

경봉

76

공자

86

구천

95

방연

102

굴원

111

번오기

69

계찰

77

맹영

87

백비

96

상앙

103

맹상군

112

신릉군

70

안영

78

비무극

88

범려

97

소진

104

악의

113

여불위

71

오거

79

손무(손자)

89

부차

98

손빈

105

염파

114

왕전

72

자산

80

안영

90

예양

99

오기

106

인상여

115

이목

73

제장공

81

양호

91

위문후

100

전기

107

전단

116

이사

74

총영왕

82

요이

92

자서

101

종리춘

108

조사

117

진시황

75

최저

83

오자서

93

조앙

 

 

109

춘신군

118

한비자

 

 

84

전제

94

조무휼

 

 

110

평원군

119

형가

 

 

85

초평왕

 

 

 

 

 

 

 

 

 

제1권

1. 강씨

시호는 무강(신나라 제후의 딸로 정무공에게 시집온 부인을 의미), 정장공 오생과 공숙단을 낳았음, 차남 공숙단을 지나치게 편애해 반역하도록 사주했다가 공숙단이 패배해 자살하자 장남에게 버림받음, 그러나 후에 영고숙의 기지로 아들과 화해함


2. 공부가

송나라의 대사마로 송상공의 오른팔, 상공을 도와 세 차례의 정나라 원정 및 다른 나라들과의 전투, 외교에서 두루 고군분투하였으나 태재 화독의 간교로 억울하게 살해되고 멸문지화까지 당함, 어린 아들 목금부만이 겨우 살아남아 노나라로 도망가 공씨의 선조가 됨, 대성현 공자는 바로 공부가의 7대손임


3. 석작

위나라의 만고의 충신, 불초한 아들 석후가 난신적자 주우를 도와 위환공을 시해하고 온갖 아첨과 간계를 일삼는 것을 보다 못해 진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그 원조를 받아 주우와 석후를 처형, 대의를 위해 아들까지 서슴지 않고 처벌한 드높은 충정과 대의멸친의 기개로 인해 후세에 한신, 충신의 대명사로 두루 칭송되었음.


4. 주선왕(B.C.827-782 재위)

주의 11대 왕, 국인 폭동으로 쫓겨난 부친 주여왕의 뒤를 계승한 후 쇄락해가는 서주왕실의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내치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동남방과 서북방의 이민족을 물리치기 위해 무리한 군사 원정을 강행하였다가 실패함으로써 주의 몰락을 부추기게 되었음.


5. 소공

무왕의 둘째 동복 동생 희석의 시호. 무왕과 형 주공을 도와 주나라 건국에 일조했고 그 공로로 왕실 최고 공경지위를 획득한 동시에  연 빵을 하사받아 연나라의 시조가 됨


6. 송상공(B.C.719-711 재위)

송나라의 제15대 군주. 송선공의 아들로 본명은 여이 송선공이 아우인 송목공 화에게 제후위를 계승하자 송목공은 그에 보답하려고 자신의 아들 방 대신 조카 여이에게 재후위를 물려줌. 이로 인해 불만을 품고 정나라로 도주한 사촌 방과 계속 불화했고 방을 보호하던 정나라를 줄곧 적대시함. 세 차례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정장공의 용병술과 제족, 영고숙 등의 활약으로 모두 실패하는 치욕을 겪고 끝내 간신 화독에게 시해 당함.


7. 영고숙

정나라 소읍인 영곡의 읍리 효성이지극한 사람으로 정장공이 모친 강씨와 불화하다는 소문을 듣고 장공을 알현하여 효도를 설파한 뒤 묘책을 내어 모자를 화해시킨 공으로 대부 작록을 하사받음. 이후 군사를 관장하면서 정장공을 도와 수차의 전투와 외교에서 크게 활약함. 그러나 허나라 정벌시 평소 그를 미워하던 공손알 이 몰래 쏜 화살에 맞아 비명 횡사함.

8. 주유왕(B.C.781-771 재위)

주의 12대 왕,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주색만을 탐닉하다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한 장본인, 애첩 포사를 총애한 나머지 정비 신후와 그 소생인 태자 의구를 폐하고 포사와 그 소생 백복을 정비와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신후를 격분시켰고. 결국 견융과 신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시살되었음.


9. 정백굴돌(B.C.770-744 재위)

정백 우(B.C.806-771재위) 재위, 시호는 환공의 아들 일명 활돌 부친의 뜻을 이어 몰락한 서주 왕실을 보필하고 부흥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임, 시호는 무공, 위나라의 무공, 진(秦)나라의 양공, 진(晉)나라의 문후와 함께 주평왕을 옹립하고 낙읍으로 천도하여 통주를 재건함. 왕실을 보필한 대공으로 신흥 제후국 정의 지위와 권세가 이후 급성장함.


10. 정장공(B.C. 743-701 재위)

정무공  굴돌과 정부인 강씨(무강)의 장남으로 본명은 오생. 모친 강씨가 동생 공숙단을 편애한 것을 빌미로 공숙단이 반역을 일으키자 이를 신속히 진압한 후 모친과 결별했으나 영고숙의 기지로 화해함. 이후 탁월한 지략과 용병술을 무기로 삼고 제족, 영고숙, 고거미 , 하숙영 등 뛰어난 명신, 책사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부친의 업적을 계승하여 정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함. 정장공 치세하에 정나라를 소패(뒤의 춘추 오패보다는 작은 패업이라는 의미)라고도 할만한 공업을  이룩.


11. 제족

정장공의 뛰어난 책사 정나라가 동주 왕실과 송, 진 위 등 주변 제후국과의 이교, 정벌전 등에서 곤경에 처할 때만다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내 매번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 함으로써 정장공으로부터 만전지계라는 극찬을 받음. 당대 제후국의 세력 판도와 천하대세의 흐름을 간파하는데 유난히 비상한 능력을 지님


12. 주공

무왕의 첫째 동복 아우인 희단의 시호.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우는 데 절대적인 공현을 하였고. 무왕 사후에는 어린 조카 성왕을 보좌해 섭정하면서 각종 문물제도와 예약 질서를 정비해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자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성현중이 성현. 주공단의 후예로 왕실에 상주하면서 대대로 왕실 사무를 담당한 최상층 공공경가문의 장자를 통칭하는 말. 열국지 1권에는 주환왕 시대에 활약한 흑견의 사적이 종종 기술됨. 고유 명사 주공과 함께 본 소설에서는 주군과 같은 뜻인 보통 명사 주공(주군인 제후 또는 공을 의미)도 많이 쓰이므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함.


13. 주환왕(B.C 719-697 재위)

주의 14대 왕. 재위 기간을 통해 여러 차례 천자의 권위와 봉건 질서를 공공연히 무시하는 정장공의 무도와 도발에 시달려 그를 매우 증오했으나 정장공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함.



제2권

14. 곡옥장백

진문후의 동생인 환숙성사의 아들로 이름은 선 부친 환숙이 문후 아들이자 조카인 소후에게서 곡옥 땅을 분봉받아 영주가 되자 후에 그 자리를 계승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진 공실을 사실상 능가하는 실력자로 성장했음. 곡옥을 분봉해준 후 진 공실은 도읍 강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국호를 익으로 개명함으로써. 진나라는 환숙 가문이 영유한 곡옥과 공실이영유한 익으로 이분되었음. 효후 15년(B.C.724)에 효후를 시해했으나 익의 도읍인 들이 장백을 공격해 곡옥으로 쫒아버린 뒤 효후의 아들 극을 악후로 옹립하였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음.


15. 관이오(?-B.C.643)

관중. 관자. 춘추시대뿐 아니라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명재상. 경전위지의 능력으로 제환공 치세(B.C.685-643)에 제나라를 최강대국으로 부상시켜 춘춘 최초의 패업을 이룩했음. 예의염치 진작, 사민분거 장려, 행정 구획정비(삼국오비제 : 대읍인 국, 도, 를 삼분하고 주변 농촌지대인 비읍을 오분하여 군사와 행정을 대폭 정비한 제도). 염철 전매실시. 상공업 진흥. 병농일치정책 등을 실시했는데 이는 두고두고 후대 경세정책들의 모법이 되었음. 포숙아와의 극진한 우정으로 관포지교로도 널리 회자됨. 제환공은 관중을 중부(작은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대단히 존경하고 의지하였으며, 사실 제나라의 패업도 제환공보다는 관중이 거의 이룩한 것이라고 보아야 함. 실제로 관중 사후 제환공은 정치력을 상실함으로써 제나라는 사분오열되고 패업의 영광도 퇴색하였음. 그러나 제나라가 춘추는 물로 전국시대 말까지 영향력 있는 일류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관중시대에  배양된 정치, 경제, 문화적 역량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음.


16. 문강

제희공의 차녀로 노환공에게 시집갔음. 출가 전부터 이복 오빠인 제양공 제아와 불의의 관계를 가졌고 출가 후에 노환공이 제나라를 방문했을 때 함께 따라가 관계를 재개했음. 이를 눈치 채고 대노한 노환공을 제양공으로 하여금 살해하게 하는 대죄를 범했음. 노환공이 죽은 후에도 계속 제, 노 양국 국경지대에 머물면서 제양공과 사통하였고 제양공의 서녀 애강과 자신의 아들 노장공의 혼인을 강제함. 이것이 후에 또 다른 비극을 낳게 됨.


17. 선강

제희공의 장녀로 천하절색, 위나라 공자 급자에게 시집왔다가 시아버지 위선공의 애첩이 되었음. 친아들 수와 삭을 군위에 올리기 위해 급자를 살해할 계책을 세웠다가 일이 잘못되어 급자와 함께 수마저 죽음을 당하고 위선공도 충격을 받고 서거함. 삭이 위나라에서 쫓겨난 후 의붓아들 석(급자의 동복동생)과 혼인해 제나라 군부인, 대공, 문공, 송환공 부인, 허목공 부인 등 5남매를 두었음. 동생 문강과 함께 요녀의 대명사.


18. 애강

제양공의 서녀. 고모 문강의 주선으로 문강 아들 노장공에게 시집왔음. 노장공은 어머니 때문에 억지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과 혼인한 후 그녀를 멀리 했고 그로 인해 노장공의 이복 동색 경보와 사통하게 됨. 경보를 부추겨 장공의 태자 반과 민공을 죽이게 만든 뒤 경보는 자살하고 그녀도 제나라의 종용으로 자살함.

 

19. 위선공(B.C.718-700 재위)

위나라의 14대 군주, 위장공의 아들이자 환공의 이복동생, 서모 이강과 통정하여 급자,금모, 석 등을 낳았음. 급자의 신부감으로 맞은 선강의 미색에 빠져 인륜도 저버리고 그녀를 애첩으로 삼아 수와 삭 두 아들을 얻었음. 천성이 사악한 삭의 간계로 수와 급자가 둘다 억울하게 비명횡사하자 충격을 받아 반년만에 세상을 떠났음.


20. 제환공(B.C. 685-643 재위)

제나라의 15대 군주로 본명은 소백. 제희공(B.C.730-698 재위)의 서자이명 제양공(B.C.697-686 재위)의 이복동생, 제양공이 연칭과 관지보에 의해 시해된 후 정적인 공자 규를 제치고 즉위하여 43년 동안 재위기간 중 관중, 포숙아, 영척 등 현신들의 보필을 받아 내치와 외정 양면에서 혁혁한 성공을 거둬 제나라를 제일의 강대국으로 진흥시키고 천하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소집해 대규모의 국제회의를 열어 패자로 추대됨으로써 춘추오패의 선봉이 되었음.


21. 진무공(B.C.715-677 재위)

곡옥장백 선의 아들로 곡옥의 3대째 백(영주)이자 후에 진나라의 18대 제후가 됨., 본명은 칭, 진나라 제후의 자리를 차지하려다 도읍인 들의 반대로 번번히 실패한 조부와 부친의 여망을 달성하여 마침내 B.C. 678년에 진의 17대 군주인 진후 민(B.C. 704-679 재위)을 시해하고 익 땅을 병합해 진을 재통일한 주희왕에게서 진 제후의 지위를 인정받았음. 곡옥백 무공의 즉위로 진나라는 방계 혈통이 직계를 물리치고 공실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서주 왕실의 동천으로 인해 봉건제의 강상 질서가 이완된 상황을 다시 한 번 재현함.

 

22. 진헌공(B.C.676-651)

진나라의 19대 군주. 곡옥백 겸 진무공인 칭의 아들. 호색하여 부친의 첩 제강과 정을 통해 태자 신생을 낳은 것을 비롯해 여러 명의 첩에서 많은 자식들을 얻었는데, 여융을 정벌하고 취한 여희를 총애한 나머지 신생을 폐하고 영희 소생의 해제를 타자로 책봉하는 실책을 저지름, 그의. 그의 사후 진나라는 공실 내분으로 한 세대정도 혼란에 빠짐.


23. 투곡오도

초나라의 주석지신. 춘추시대의 초의 3대 유력 가문 중 하나인 투씨의 장로로 투백비와 운나라 공년 사이에서 사생, 출생 직후 들판에 버려졌으나 호랑이가 젖을 먹여 길렀다는 전설이 전해짐. 오만무도한 영윤 자원이 피살된 후 영윤이 되어 B.C.664-637년 간 재직하면서 부국강병책을 적극 추진 초나라를 남방 대국으로 크게 융성시켜 중원의 맹주인 제,진과 대적하게 함. 제나라의 관중과 비견될 만한 명재상.


24. 초문왕(B.C.689-677 재위)

초나라의 18대 군주, 칭왕한 웅군 무왕 웅통(B.C. 740-690 재위)의 아들로 성명은 웅자, 선왕의 뒤를 이어 내치에 공을 세웠으나 식나라 제후의 부인을 빼앗기 위해 식을 멸하고 그를 사주한 채나라의 애후를 포획하는 등 곡절도 많았음. 영에 도읍한 후 북진을 추진하여 한수 일대 소국들을 점령해 장각 이북의 넓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증손 초장왕대에 패업을 달성하는 기초를 마련했음.


25. 포숙아

제나라의 현신. 제양공 사후공자 소백을 보필하여 제환공으로 옹립한 뒤 제환공의 적이었던 공자 규의 책사 관중을 제환공에게 적극 천거해 그를 재상으로 삼아 제나라의 패업을 이룩하게 함. 언제나 넓은 도량으로 관중을 이해하고 도우며 관포지교로 회자되는 굳은 우정과 신의를 지켜 관중에게서 “생아지부모 지아자포숙(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는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이라는 찬탄을 들었음.


제3권

26. 계우

노나라 고자. 노환공의 말자로 형 노장공이 서거한 후 제후위를 노리는 서형 경보의 난을 수습하고 그를 추방시켜 더 큰 혼란을 막음. 난리가 가라앉고 노장공의 아들 노희공이 즉위하자 내정을 안정시킨 공로로 비읍과 문양 땅을 하사받고 계손씨의 개조가 됨. 그의 자손들은 후대에 공손 오의 자손들인 맹손씨와 공손 자의 자손들인 숙손씨와 함께 “삼환씨”로 통칭되면서 노나라 내정을 전단하게 됨.


27. 건숙

제나라 출신의 현인, 세상이 몰라주는 백리해의 비범함을 첫눈에 간파하고 그를 오랫동안 거두어 줌. 백리해가 주인을 찾아 나설 때마다 신중할 것을 거듭 충고했고 드디어 진목공에게 발탁되자 그의 추천으로 역시 진목공을 섬기게 됨. 뛰어난 지략과 경륜으로 백리해와 함께 진목공이 서융의 패주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


28. 공손지

진목공의 책사 겸 충신. 진나라 땅에서 한낱 필부로 농사짓고 살다가 공자 칩에게 발탁되어 진나라의 대부가 되었음. 백리해. 건숙 등과 함RP 진목공을 훌륭히 보필하여 서방의 웅군으로 군립하도록 이끌었음.


29 백리해

진나라의 현인 정치가. 제나라의 관중에 비견될 만한 탁월한 책략과 경천위지의 재능을 지녔으나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난 데다 불운하여 오랫동안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걸식하면서 천하를 유람했음. 한때 제나라에서 건숙의 도움을 받았고 우나라의 우주를 섬기기도 했으나 늘그막에 진목공에게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천하를 경영하게 됨. 입신 후 건숙을 추천하고 서융의 택사로 있던 요여를 포섭하는 등 여러 현사, 충신들을 끌어 모은후 그들과 함께 진목공을 보필해 진나라를 서융의 패주로 부흥시킴으로써 후세에 중원을 경략할 토대를 튼튼히 함.


30. 순식

진나라의 노신, 진헌공에게서 여희 소생인 해제를 보필하라는 유명을 받고 초지일관하게 임무를 완수하려 했으나 여희 일당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극, 비정보 일파에 의해  피살되었음. 그의 충성을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무비찬적이라는 비판이 많기 때문에 보통 진정한 충신의 반열에는 들지 못한다.


31. 여희

진헌공이 여웅을 정벌하면서 얻은 여융 수장의 딸. 동생 소희와 함께 진나라로 시집와 헌공의 총애를 독차지했음. 총애를 기화로 아들 해제를 군위에 올리기 위해 양오, 동관오, 여이생, 극예 등 간신들의 도움을 얻어 죄없는 태자 신생을 자결케 하고 공자 중이, 이오 등을 추방한 후 일시적으로는 뜻을 이루었으나 이극 등이 일으킨 반정의 와중에 아들도 죽고 자신은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했음, 여희가 일으킨 분쟁으로 진나라는 중이가 귀국해 즉위할 때까지 20여 녀 간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며, 그로 인해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여화로 꼽힘.


32. 이극

진헌공 시기의 책사이자 권신, 무공과 전략에 뛰어나 진헌공 시기에 우,괵을 정벌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음. 그러나 재능에 비해서는 성품이 강직하지 못해 진헌공의 폐세자를 방관한 결과 진나라가 한 세대 동안 피비린내 나는 내란에 휩싸이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자신도 진혜공이 이오에 의해 사사되었음.


33. 제환공(B.C.685-643 재위)

제나라의 15대 군주이자 춘추시대의 1대 패자. 관중과 포숙아. 습붕 등의 보필하에 춘추오패의  수위가 되어 존왕양이와 계절존망의 덕업과 공명을 만방에 떨쳤음.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자신이 성추한 공업에 만족한 나머지 점차 안일해져 정사를 등한히 하고 역아와 내시 초등 간신배들의 아첨에 흘리게 되었음. 결국 관중 사후 조정은 급ㅂ속히 부패해지고 제환공 사후 치열한 군위 계승 분쟁이 벌어져  제나라의 패업도 퇴색하게 됨.


34. 진목공(B.C. 659-621 재위)

진나라의 14대 군주로 본명은 임호 진나라의 진흥의 터전을 마련한 영명한 군주로 공자 칩, 백리해, 건숙 서걸숙, 건병(건숙의 아들), 공손지, 요여 등 내로라하는 현신, 책사들의 보필을 받아 서융(서방 이족에 대한 통칭) 지역의 많은 부락들을 정벌해 진나라의 영토와 영민을 대폭 증가시킴으로써 진을 무시못할 서방 강국으로 융성시켰음. 이 때문에 진목공을 춘추오패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은데. 오패로까지 간주하지는 못하더라도 서융의 패자였던 점은 확실함. 진공자 이오를 진혜공으로 세우는 데 적잖은 원조를 했으나 진혜공이 즉위 후 이전의 약조들을 번번이 어기고 신의 없는 정치를 일삼자 대노하여 진나라를 공격해 진혜공을 포획했음. 부인 목희의 탄원과 다수 신하들의 충간으로 진혜공을 석방해주었으나 진혜공이 석방된 후 곧 사망하자 진혜공의 이복형인 중이를 사위로 삼아 그가 귀국해 진문공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35. 진혜공(B.C.650-638 재위)

진나라의 20대 군주, 진헌공(B.C. 676-638 재위)과 견융 차녀의 아들로 본명은 이오, 여희의 간계로 태자 신생이 자결한 내란이 발생하자 양나라로 피신했다가 이극, 여이생 등의 활약으로 여희 일파가 숙청되자 돌아와 제후위를 차지, 욕심 많고  신의가 없어 재위 기간 동안 신생의 폐세자와 여희 일파 소탕에 연루된 대신들을 비롯 많은 이들을 처형하여 인심을 잃고 내정을 더욱 어지럽게 했으며 서방의 강린 진나라에게도 번번이 신의를 어겼음. 이로 인해 B.C. 645년에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는 국가 비상사태를 초래했으나 누이이자 진목공의 부인인 목희의 탄원과 목공과 진나라 대신들의 아량으로 요행히 석방되었음.


36. 초성왕(B.C.671-626 재위)

초나라의 20대 군주 초문왕과 식규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본명은 웅운, 형 도오를 시해하고 군위에 오른 후 한동제국과 회수유역 국가들을 대거 점령해 양자강 유여가 사방천리의 영토를 획득하면서 남방의 맹주로 발돋움했음. 본 소설에서는 제환공, 진문공 등 중원제후국 패업성취 과정에 중점을 둔 때문에 성왕을 다소 간교하고 신의 없는 인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초나라의 2-3세대 뒤의 패업의 기초를 마련한 웅주라 할 만하다.


제4권

37. 개자추

일명 개자추 본명은 개추임. 공자 중이의 고난스러운 주유천하를 시종일관 지극정성으로 보필했으며 특히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 중이를 대접한 일화는 유명함. 중이가 진목공의 원조를 받아 귀국하여 문공으로 즉위하는 데 누구보다도 큰 공을 세웠으나 즉위 직후 벌어진 논공행상을 구차하게 여겨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청빈하게 살았음. 진문공이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 산에 불을 질렀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끝내 어머니를  감싸 안고 불타 죽었음. 그의 지극한 충정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불타 죽은 음력 3월 초닷새 날에는 일체 화식을 금하는 풍습(한식절)이 생겨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음.


38. 선진

진나라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책사. 전문공의 주유천하를 시종 보필한 고굉지신 들 중 하나인데 군가, 전술에 특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유명한 성복전투(B.C.632년)에서 성득신이 이끈 초나라 군사를 궤멸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음.


39. 성득신

초나라의 현신 투곡오도(자문)의 종재이자 초의 3대 유력 가문인 성씨의 개조. 자는 자옥, 투곡오도가 영윤직을 은퇴한 뒤 B.C.637-632년간 영윤을 역임하면서 초나라의 군사 대권까지 장악. 용맹과 지략을 겸비해 유명한 홍양전투에서 송나라를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으나 조급한 성미로 인해 진.제.연 등의 외교전에 말려 성복의 전투에서 대해하고 초나라 군사의 대부분을 잃은 뒤 자살했음.


40. 송양공

송나라의 19대 군주, 송환공(B.C.681-651 재위)의 적자, 서형 자어의 양보로 군위에 올라 B.C.650-637 년간 재위, 제환공의 뒤를 계승하여 중원의 패자가 되어보겠다는 분에 넘친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이 주도한 희맹에 늦게 도착한 소국 증나라의 군주를 죽여 수수의 신의제사에 희생으로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초나라의 중원 제후국간의 외교는 물론 내정에서도 실정을 거듭했음. 홍양의 전투(B.C.638)d에서 성득신이 이끄는 초나라 군대에게 대해한 후 그때 입은 부상으로  반년 만에 서거했음. 송양지인 고사의 장본인으로 도덕군주인 양 하는 어리석은 위선자의 대명사.


41. 제강

강성인 제나라의 공녀라는 의미

제환공의 딸로 진무공(B.C.715-677 재위)의 후취가 되었다가 그  아들인 진헌공(B.C.676-651 재위) 궤제의 정부인이 된 여성, 세자 신생과 후에 진목공의 부인이 된 목희를 낳았으나 요절했음.

제환공의 또 다른 딸로 진문공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여성, 진문공이 주유천하 도중 제나라에 들렀을 때 제환공이 극진히 후대하면서 자신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음. 제나라에서의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에 젖어 점차 원대한 뜻을 잃어가는 진문공을 측근 신하들이 납치하다시피 하여 제나라를 떠나고자 했을 때 부부의 정을 끊으면서 문공을 보내주는 일대 결단을 내렸음. 고모인 문강, 애강과는 달리 강인한 의지와 절개, 인내심을 지닌 여성으로 오랜 인내의 결과 진문공이 즉위한 후 책나라의 공녀 계외의 다음 자리인 두 번째  부인이 되었음. 제강은 시호이기 때문에 이처럼 동명이인이 생긴 것임.


42. 주양왕

주의 18대 왕으로 (B.C.651-619년 재위) 혜왕(B.C.676-652 재위)의 적장자로 일찍이 태자에 보해졌으나 후에 부왕이 계비로 맞은 진규에 빠져 그 소생인 태숙대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그 눈치를 채고 제환공을 비롯한 여러 제후들에게 원조를 요청, 이에 8국 제후들이 B.C.652년에 조 땅에서 회맹하여 태자를 신왕으로 옹립할 것을 맹서했고 그 덕분에 이듬해에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음. 그러나 재위 3년 만에 태숙 대가 적인과 내통한 일 때문에 한 차례 위기를 겪었고, 재위 16년(B.C.636)에는 태숙이 자신의 비인 외후와 사통한 우여곡절이 많았음. 재이 기간을 통해 줄곧 제환공과 진문공의 원조를 받으면서 그들의 패자 지위를 수동적으로 인정해주는 입장이었음. 그로 인해 양왕 시기를 지나면서 주 천자는 패자인 제후들에게 종속되는 지위로 전략하게 되었음.


43. 진문공

진나라의 22대 군주로 B.C.636-628년 재위, 진헌공의서자로 견융공년 소생이며 본명은 중이. 부친의 애첩인 여희의 흉계로 나라에서 쫓겨난 뒤 호언, 호모, 조쇠, 위주, 호사고, 전힐, 개자추, 선진, 호숙 등 충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천하를 주유했음. 주유과정에서 세상사에 대한 폭넓은 견문과 처세의 경험을 쌓았으며 인간사를 다루는 폭 넓은 지혜와 경륜을 체득했음. 진목공의 원조를 받아 실정만을 거듭했던 이복동생 혜공(B.C.650-638 재위)의 아들이자 역시 암군인 회공(B.C.637 재위)을 몰아내고 진나라의 군위에 오른후 공명정대한 정치로 내정을 안정시키고 군사, 경제력을 부흥시켰음. 내치 안정을 토대로 성복전투(B.C.632)에서 남방 초나라의 대군을 격하해 중원의 평화를 수호하고 천토에서 중원 제후들을 소집하여 그들을 위복시킴으로써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업을 이룩했음..


44. 태숙(B.C.,676-652. 재위)

주의 17대 와인 주혜왕 희랑과 진규(규성인 진(陳)나라의 공녀)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18대 왕인 양왕 희정(B.C.651-619 재위)의 이복동생, 양왕이 태자 시절일 때부터 모친 혜후(진규)와 함께 태자 지위를 공공연히 넘보았으나 제환공 영도하의 제후들이 양왕을 강력하게 지지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음. 양왕 3년인 B.C.649 년에 이 낙 양, 거, 천, 고 땅의 이민족을 부추겨 왕성을 침범하게 한 사실이 발각되어 제나라로 도망했음. 후에 부진의 충간으로 양왕이 그를 다시 왕성으로 불러들이는 은혜를 베풀었으나 그를 배반하고 형수인 이후(책나라 공녀인 외씨와 사통한 뒤 B.C.。636년에 재차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당함.


45. 호돌

진나라의 노대신이자 만고의 충신, 세자를 신생에서 애첩 여희소생 해제로 바꾸려는 진헌공에게 누차 폐세자의 불가함을 충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마침내 여희의 잔악한 간계로 신생이 자결하고 공자 중이와 이오가 국외로 도주했을 당시, 아들 호모, 호언 형제에게 인품과 도량을 갖춘 중이를 따라가 섬길 것을 권고했음. 아들들이 떠나간 후에도 국내에 계속 남아 여희 일파의 파멸과 혜공 즉위, 혜공의 거듭된 실정 등 어지럽고 혼란한 시국 속에서 꿋꿋하게 절개를 지키면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희공(혜공의 아들, B.C.637 재위) 즉위 직후 억울하게 처형되었음.


46. 호모, 호언

진나라의 충신 호돌은 아들들, 진헌공 사후 여희 일파의 전횡으로 벌어진 대혼란 속에서 부친의 명을 따라 현명한 공자 중이를 섬길 것으로 맹서한 이후 19년간 중이의 주유천하를 한마음으로 호위했음. 진목공의 원조하에 중이가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와 문공으로 즉위한 연후에는 역시 일편단심으로 문공을 보필하여 어수선한 내정을 수습하고 눈부신 외정성과를 거두어 춘추의 두 번째 패업을 이루는 데 공헌했음. 특히 호언은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에 신세를 질 당시 약조했던 내용(초나라와 부득이하게 전쟁을 벌일 경우 초군 앞에서 일단은 3사=90리를 후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도록 하는 등 신의와 정도에 관련된 충간을 자주 했음.


47. 회부기

조나라의 충신이자 현신, 시정의 잡배, 간신배들하고나 어울리는 어리석은 주군 공공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누차 충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진나라의 공자 중이가 조나라를 지날 때 공공을 비롯한 조나라 사람들 모두가 그를 푸대접하고 조롱하여 중이를 노하게 했으나 오직 희부기만이 중이의 인격과 자질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했음. 후에 진문공이 된  중이가 조나라를 정벌해 간신들을 대숙청하면서 희부기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는데 이를 시기한 위주와 전힐이 희부기의 집에 방화를 하여 불행하게도 그 속에서 불타 죽었음.


제5권

48. 동호

진나라 영공(B.C. 620-607 재위), 성공(B.C.606-600 재위) 시기에 생존했던 뛰어난 사관 진영공 시해사건(B.C.607) 당시 집정 조돈이 시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지도자인 승상으로서 구차하게 몸을 피해 국경 부근으로 달아난 점, 국내에 있으면서도 국난을 구하려고 하지 않은 점, 영고을 시해한 이들을 사후에 벌하지 않은 점 등 몇몇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사실을 필주(붓으로써 벌을 줌)하기 위해 ‘조돈이 도원에서 주군 이고를 시해했다’고 기록했음. 이 같은 강직하고 서슬 퍼런 직필로 인해 후대의 사관, 사가들의 사표가 되어 널리 칭송되었음. 동호의 직필정신과 사관으로서의 긍지, 책임감을 통해 중국인들의 수준 높은 역사의식과 엄정한 역사 서술원칙의 정수를 볼 수 있음.


49. 맹명

천하의 명신 백리해의 아들로 본명은 백리시, 효산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돌아온 것을 몹시 수치스러워하면서 진나라에 절치부심 복수할 날만을 고대하며 군사 훈련에 몰두했음. 마침내 B.C.625년에 팽아에서 진나라를 패배시켜 효산전투 이래의 오랜 수모를 설치했음.


50. 선진

진나라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책사 진문공의 주유의 주유천하를 지종보필한 고굉지신들 중 하나인데다 군사, 전술 방면에서 특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유명한 성복전(B.C.632)에서 성득신이 이끈 초나라의 대군을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음. 그러나 문공의 다음 대 군주인 양공 원년에 진나라와의 효산전투에서 붙잡은 진의 3대 명장 맹명, 서검술, 백을병을 그냥 석방해준 것에 분노한 나머지  주군인 진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는 근 무례를 범했음. 이를 진양공이 처벌 않고 용서해주자 후에 책나라와의 전투에서 적군마저 신인이라 감탄할 만큼 눈부신 전공을 세운 뒤 주군에게 사죄의 편지를 남기고 옥쇄했음 


51. 손숙오

초나라의 명신, 위가의 아들. 위오, 위애렵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야두사(마주 본 사람을 죽게 만든다는 요물)를 보고 타인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즉시 죽여 땅에 묻었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로 용기와 지혜, 깊은 사려를 지녔던 인물. 장왕의 둘도 없는 책사가 되어 군제를 개혁하고 내정을 쇄신하며 각종 수리, 영전사업을 일으킴으로써 초나라가 안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밖으로 춘추의 3대 패업을 성취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음. 장왕이 그의 공적을 가상하고 고맙게 여겨 부유하고 넓은 읍을 하사하고자 했으나 그를 고사하고 척박해서 아무도 탐내지 않는 침읍을 청했음. 그리하여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어려움 없이 침읍을 영유했는데 이로부터도 그의 지혜와 처세술을 알 수 있음.


52. 영유

위나라 성공(B.C.634-600)의 둘도 없는 충신, 부친 영척이 16대 군주인 의공(B.C.668-600 재위) 시기에 적인의 침입으로 온 강산이 도륙났던 대국난을 극복한 데 이어 자신의 주군인 성공을 시종일관 충심으로 섬겼음. 위성공이 천성적인 시기심과 변덕으로 당시의 패자 진문공의 노여움을 사 초래한 위기를 갖은 기지와 용기로 극복하면서 결국 성공을 복위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성공의 동생인 공주 숙무, 충신 원훤 등을 주게 만들고 적지 않은 내정 혼란을 초래했음. 따라서 성공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복이지만 위나라의 진정한 사직지신이나 주석지신의 반열로는 볼 수 없음.


53. 조돈

진나라의 권신, 진문공(B.C.636-628 재위)의 고굉지신이었던 조쇠의 아들, 진양공(B.C.627-621 재위) 사후 공자 옹을 옹립하려다 조야의 반대로 번복하고 그대로어린 세자 이고를 영공(B.C.620-607 재위)으로 옹립한 후 유주를 대신해 정권을 장악했음. 그러나 영공의 타락과 무도를 막지 못했고 여공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보신에만 급급한 나머지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미온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결국 명사관 동호로부터‘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 는 필주를 받게 되었음. 제후국 간의 외교 책략에 능했고 빠른 상황 판단력과 현실적인 정치 감각 통솔력 등을 지녔으나 정도만을 걸었다고는 할 수 없는 행적을 종종 남겼음.


54. 진목공(B.C.659-621 재위)

진나라의 14대 군주 백리해. 건숙 공손지 등 쟁쟁한 현신, 책사들의 보필 아래 서융의 패업을 성취했으며, 진나라와 세 번 싸웠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재위 기간 진나라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음. 평생 의욕적으로 내치와 외정에 몰두했으나 말년에는 신선 사상과 청정무위 수양에 심취 모든 정사를 맹명(백리해의 아들)에게 맡기고 음풍농월했다고 함.


55. 투월초

장왕 재위 초기의 영윤, 초나라의 3대 유력 세경가 중 최고인 투씨의 일원이면서 종주격에 상당하는 투곡오도의 직계 후손들을 시기하고 미묘한 알력, 경쟁 관계에 있는 성씨 일파들에 대해서도 은근한불만을 느낀 데다, 즉위 직후부터 투씨와 성씨를 경계하면서 위씨 일파를 적극 중용하는 장왕에 대해 깊은 불만을 느끼고 있었음. 특히 장왕의 신뢰와 총애속에 조정에서의 실권으 점점 잠식해가던 위가를 증오하여 그를 살해한 후 장왕에 대해 대대적인 반란을 l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자산은 물론 약오씨 전체의 멸문지화를 초래했음. 춘추좌씨전 등에 성격이 조급, 과격하며 음침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음.


56. 초목왕(B.C.625-614 재위)

초성왕의 세자이자 초나라의 21대 군주로 본명은 상신 투발을 참소한 사건을 계기로 부왕의 미움을 받게 되어 이복동생 직에게 세자위를 빼앗길 지경이 되자 사부 반승의 계책하에 선수를 쳐 부왕을 시해한 후 즉위. 즉위 후 강, 육, 요 등 중원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위치한 회수 유역 소국들을 차례로 정벌하여 중원 제후들을 위협하는 한편, 중원의 진 정나라 등을 침입하여 초나라의 영역과 세력 범위를 더욱 넓혔음. 부친을 시해하는 패륜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다방면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아들인 장왕시기에 초나라가 제, 진의 뒤를 이어 춘추의 3대 패업을 쟁취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음.


57. 초장왕(B.C.613-591 재위)

초목왕의 태자이자 초나라의 22대 군주로 본명은 여 즉위 후 3년까지는 약오씨 세력의 전횡 때문에 통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즉위 3년째인 B.C.610년에 발생한 대기근과 그를 틈타 침입한 인근 이민족들인 백복과 군만의 외란을 위씨 일파와의 협조하에 잘 극복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음. 이후 위가 위여신 위애렵 등을 중용하면서 행적 구조개편, 군사제도 개혁 등 다방면으로 내정을 쇄신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했으며, 그 토대 위에서 B.C.606년에 육혼융을 정벌하고 그 위세를 몰아 낙수 유역의 주 왕성 부근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해 초나라의 군사력과 위엄을 만방에 떨쳤음. 이때 사신으로 참석한 옹손만(양와의 손자)에게 왕실이 보유한 보기인 구정의 크기를 물어 천하를 지배하겠다는 옹골한 야심을 표현했음. B.C.605년에는 초나라의 대족이자 왕권의 최대 장애였던 약오씨 세력을 꺾어 완전한 전제권을 확보했고, 이후 내정에 대한 근심 없이 거침없는 영토 확대를 이루면서 중원의 패권을 쟁취하여 초나라를 제, 진을 이응 세 번째 패권 국가로 부상시켰음.


제6권

58. 공자 영제

일명 자중 초장왕의 동생이자 공왕의 숙부, 장왕 사후 공왕이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영윤 직(B.C.590-570 재직)을 장악해 국정을 이끌면서 강한 지도력을 발휘했음. 이로 인해 공왕 초기에는 그의 권세가 한때 왕권을 능가할 정도에 이르기도 했음. 일례로 B.C.579년에 송나라 대부 화원의 주도로 초나라와 진나라가 필전투(B.C. 597)이래의 불편한 관계를 풀고 상호 화평 조약을 맺었을 때도 공왕보다는 영윤 영제가  실무를 주도했음. 이 때문에 공자 측, 굴무 등 반대파들과의 알력과 갈등도 적지 않았는데 위기 때마다 탁월한 정치력으로 이를 잘 극복했음. B.C.570년에 오나라가 침공해 오자 몸소 출전해 구자 땅을 획득하고 승승장구하다가 오나라의 복병에 패해 명장 등요가 가읍을 상실했음. 백성들이 이를 두고 자신을 비난하자 얼마 안 되어 울화병으로 사망했음.


59. 굴무

초나라의 대부 초장왕 시기에 당대의 실권자였던 공자 영제, 공자 측과 대립하면서 상당한 정치적 파란을 일으켰던 인물, B.C.598년(장왕 16년)에 진나라를 멸국치현하고 이듬해인 B.C.597년에 신, 여의 2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많은 활약을 했으나 이 와중에 공자 영제의 미움을 사게 됨, 하징서의 진영공(B.C.613-599 재위) 시해를 구실삼아 진나라를 멸국치현했을 당시 진영공 시해 사건의 원흉이었던 절세의 미녀 겸 음녀 하희에 대해 흑심을 품고 공자 측이 하희를 아내로 삼으려는 것을 극력 반대함으로써 초장왕이 그녀를 연로한 연윤 양노에게 시집가도록 만들어 공자 측의 원망을 샀음. 그해에 벌어진 진나라와의 필전투에서 양노가 사망하자 하희를 고향인 정나라로 돌려보낸 후 8년 동안 기회를 노나라가 B.C.589년에 제나라로 사신가는 틈을 타 정나라에 들러 하희와 혼인한 후 진나라로 도망쳤음. 진나라는 그에게 형읍을 주고 대부로 삼았으나, 대노한 초공왕과 영윤 영제는 굴무의 일족을 모두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음. 이를 원망한 굴무는 초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장강하류의 신흥국가인 오나라를 적극 지원하여 전거. 진법, 전술 등을 전수해주면서 오나라의 반초관념을 부추겼음. 그 결과 오나라는 B.C.584년에 초나라를 최초로 공격한 이후 계속해서 오나라의 국방과 패권을 위협하게 됨.


60. 도안가

진나라 경공(B.C.599-581재위)시기의 간신, 진혜공(B.C.584-637 재위)시기의 간신이자 공자 중이(훗날의 진문공)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장본인인 도안이의 손자로 암군인 진경공에게 부화뇌동해 온갖 아첨과 술수, 참소 등을 일삼으면서 진나라 조정을 혼란과 퇴폐로 이끌었음. B.C.584년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조삭을 비롯해 조씨 일문 전체를 몰살하는 일대 참극을 벌였으나 조삭의 충복인 정영이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는 비상수단을 쓰면서까지 조삭의 유복자 조무를 구사일생으로 구출해 깊은 산속으로 숨는 바람에, 큰 후환을 남겼으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음. 그후 여공(B.C.580-574 재위) 시기에도 난씨, 극씨와 함께 한동안 권세를 누렸으나 영공이 난서와 순언에게 시해되고 영명한 군주인 도공(B.C.573-558)이 즉위해 간신배들을 일대 숙청하고 내정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본보기로 처형되었음.


61. 양유기

초나라의 장군이자 춘추시대 제일의 신궁, 궁술이 입신이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많은 전설적인 일화를 남겼음. 워낙 백발백중이었기 때문에 “양유기는 활살 하나면 족하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함. B.C.575년의 언릉전투에서 공왕이 적군인 진나라에게 밀리고 한쪽 눈까지 잃는 큰 부상을 당하자 화살 한 대만을 가지고 적진으로 가서 공왕에게 상해를 입힌 여기를 순식간에 쏴 죽여 공왕의 복수르 하고 큰 상을 받았음. 이후에도 초나라를 윟 수많은 전투에 출전해 신궁이 솜씨를 과시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우다가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음.


62. 위강

진나라 도공 시기의 맹장. 시호는 위장자, 위주(위무자)의 차남이고 위과(위도자, 결초보은의 주인공)의 아우, 진문공의 주유천하를 보필한 부친의 공을 이어 형과 함께 진나라 공실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음. 특히 군령과 군기를 한치의 빈틈도 없이 엄정하고 공명정대하게 관리하여 이름을 드날렸음. 진도공을 보좌하여 초, 정, 송, 위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으며 진도공에게 각종 지혜로운 충고를 아끼지 않았음. 진도공이 선대의 패업을 계승하여 B.C.570-562년의 8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주도한 회맹에서도 절대적인 공헌을 했음. 후에 진도공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정나라가 바친 기물들 중 절반을 하사하려고 했으나 고사하여 받지 않았음.


63. 진도공(B.C.573-558 재위)

진나라의 28대 군주로 본명은 주, 진양공(진이 23대 군주, B.C.627-621재위)의 증손자이자 진여공의 7촌 조카로 부친 경백 담과 함께 낙양에서 지내오다 황음무도한 폭군 진여공이 난서, 순언 등의 음모에 의해 시해되자 진나라의 다수 경대부들의 요청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와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음. 어린 나이에도 불고하고 놀라울 정도의 영명함과 담대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자신을 제후로 추대한 여러 경대부들로부터 충성의 서약을 받아낸 후 간신 이양오, 청불퇴, 정활 등을 처형하고 백관을 공명정대하게 임명하며, 관기를 숙정하는 동시에, 부세 경감, 빈민구휼, 부채탕감, 재난구제, 음락금지, 형벌경감, 농시준수, 법률정비 등 대대적인 내정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진나라의 내치를 오랜만에 공명하게 만들었음. 이 같은 내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재 달성해 진나라의 위명을 새롭게 드날리면서 주위 국가들의 분쟁과 갈등을 조정해 중원이 질서를 다시 안정시키고 화평하게 했음. 그리하여 B.C.570-562년의 8년 동안 중원 국가들을 9차례(B.C.570, 566, 565, 564년에 한 차례, 563년과 562년에 두차례)나 회맹에 소집함으로써 진문공시기와 같은 패업의 영광을 부활시켰음. 춘추오패로 꼽히지는 않으나 제후국들의 항쟁과 지리멸렬한 전투가 갈수록 빈번해지던 춘추 중후기에 비교적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확립하고 여러 제후국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영향력과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할 수 있음.


64. 초공왕(B.C.590-560 재위)

초나라의 제23대 구주로 본명은 심, 초나라를 춘추시대의 세 번째 패권국가로 부흥시킨 웅군 장왕의 아들로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 재위기간을 통해 숙부인 공자 영제의 보필을 받으면서 부친의 패업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모로 고군분투했으나 진나라의 패업을 부흥시키면서 당대를 풍미한 영명한 군주 진도공(B.C.573-558 재위)의 업적에 상대적으로 눌려 고전했음. B.C.575년의 언릉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은 큼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진에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이 전투에서 결국 패배함으로써 패권의 흐름도 진나라로 넘어가게 되었음.


65. 초장왕(B.C.613-591 재위)

초나라의 22대 군주로 본명은 여. 즉위 3년째인 B.C.610년에 대기근과 백복, 군만의 대대적인 침입을 위씨 일파와의 협조하에 극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위가, 위여신, 위애렵 등을 중용하면서 행정구조 개편, 군사제도 개혁 등 다방면으로 내정을 쇄신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했음. 그 토대 위에 B.C.606년에 육혼융을 정벌하고 낙수(주나라 기내를 관류하는 황하의 지류) 유역의 주 왕성 부근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해 초나라의 위엄을 만방에 l는 한편, 사신으로 참석한 왕손만에게 주왕실이 보기인 구정의 크기를 물어 천하를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표현했음. B.C.605년에는 왕실의 최대 장애였던 약오씨 세력을 꺽어 왕권을 대폭 강화했고, 이후 내정에 대한 근심없이 거침없는 영토확대를 이루면서 중원의 패권을 쟁취하여 초나라를 제진을 이은 세 번째 패권 국가로 부상시켰음. 재위 16년인 B.C.598년에 진나라의 하징서가 황음무도한 진영공을 시해한 사건을 빌미로 삼아 진을 완전히 멸국시켜 초나라의 일개 현으로 삼았으나 신숙시의 간언과 중원제국의 여론을 고려하여 곧 치현을 취소하고 진을 복국시켰음.


66. 하징서

진나라의 비운의 대부로 절세의 미인이자 탕녀인 하희와 하어숙사이에서 태어났음. 장성하면서 어머니의 음란을 알게 되어 몹시 괴로워하고 부그럽게 여기던 차에 어머니와 동시에 상관하면서 온갖 추잡한 희학질을 서슴지 않았던 간신 공영,의행보, 진영공 등이 한자리ㅣ에 모여 자신이 출생을 가지고 음탕한 농을 하자 격분한 나머지 진영공을 시해하는 비극을 저질렀음. 이름 빌미로 삼아 초장왕이 진나라를 멸국치현했을 때 억울하게 능지처참 당했음..


67. 하희

정나라 모공(B.C.627-606 재위)의 딸로 절세의 미인이자 천하에 둘도 없는 음녀, 결혼하기 전부터 행실이 나빠 이복 오빠인 공자 만과 깊은 관계를 가졌으며, 진나라 대부 하어숙에게 출가하여 아들 징서만을 둔 채 과부가 된 후에는 더욱 문란해졌음. 진나라의 간신 공여, 의행보, 진영공과 동시 상관하는 추잡한 짓을 저지를 것이 빌미가 되어 그를 참다못한 아들 하징서가 영공을 시해하는 비극을 저지르게 만들었음. 이를 구실로 삼아 초나라의 장왕이 하징서를 능지처참하고 진나라를 멸국 치현했다가 신숙시이 간언에 의해 치현을 취소하고 우여곡절을 겪었음. 이때 하희는 장왕의 명령에 의해 연윤 양노에게 출가했는데 바로 그해에 양노가 필전투에 참전하자 의붓 아들인 흑요와 통정했고 양노가 전사하자 세인의 지탄을 받아 고향인 정나라로 도망쳤음. 그후 진나라를 멸국했을 때부터 하희에게 흑심을 품어왔던 초나라 대부 굴무가 나라를 배반하면서까지 정나라로 도망쳐 와 하희와 결혼했음. 이로 인해 굴씨 집안도 온통 도륙을 당했는데, 이처럼 한 나라를 뒤짚어 엎고 한 제후와 세 가문을 패가망신시킨 전력(?)을 볼 때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대표라고 할 만함.


제7권

68. 경봉

제나라의 간시, 최조와 공모하여 제장공(B.C.553-548 재위) 을 시해한 후 좌상이 되어 국정을 농단했음. 장공 시해 후 2년 만에 최저의 전처 아들들인 성, 강과 후처 당강 소생이 명이 종주지위와 영읍승계문제를 놓고 분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이용해 최저 가문을 멸망시키는 간악한 행위를 저질렀음. 이듬해인 B.C.545년에 경봉 일파의 전횡과 황음무도함에 불만을 품은 대부 고채와 난조가 노포별, 노포계 형제 및 왕하가 공모해 경씨 일족을 멸문하고 재산을 몰수했음. 이 와중에 경봉은 노나라로 도망했다가 다시 오나라로 도망하여 오나라 군주 구여에게서 주방땅을 분봉받고 정착했음. 그러나 불과 6년 만인 B.C.539년에 초나라 대부 굴신이 채, 진, 허, 돈, 호, 심, 회이 등의 연합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을  때 처형당했음. 이후 그 후손들은 열국을 전전하여 그 분명한 사적을 알 수 없는데, 다만 전국 시대 말에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유명한 자객 형가가 그 자손이라고 함.


69. 계찰

오나라의 성인, 오왕 수몽(B.C.585-561 재위)의 네 아들 중 막내, 네 형제 중 가장 현며앟여 부왕 수몽이 일찌감치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세 형들을 위해 양보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은 일화로 유명함, 비록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세 형들인 제번(B.C.560-548 재위), 여제(B.C.547-544), 이말(여매, 이매:B.C.543-527 재위)을 차례로 보좌하면서 오나라의 부강을 이끌었음. 특히 셋째형인 이말이 즉위한 직후에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각국을 순방하면서 정나라의 자산, 제나라의 안영, 진나라의 숙향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느 현인 정치가들과 교류하고 문화, 역사, 정치에 대해 담론함으로써 그 현명함을 만방에 떨쳤음. 그러나 이말의 아들인 요(B.C.526-515 재위)를 공자 광(합려,B.C.514-496 재위)이 시해했을 당시 난신적자인 광(합려)을 벌하지 않고 그대로 즉위하도록 방관했기 Eopans에 완전한 성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제기됨.


70. 안영

제나라 장공 ~ 경공(B.C.547-490) 시기의 현신으로 자는 평중. 역신 최저와 경봉이 난을 일으켜 제장공을 시해했을 당시, 군주가 사직을 위해 죽거나 도망가면 나라의 신료된 자는 마땅히 그를 따라야 하지만 사사로운 일로 죽거나 도망갈 경우(장공은 최저의 후실인 당강과 통정하여 최저에게 사원을 사 시해되었으므로 사사로운 일로 죽은 것임) 신료는 종묘사직 보존과 백성의 위무를 군주의 안위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침착하게 난리를 수습하고 역신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훌륭히 하였음.  이후 최저와 경봉이 부덕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제풀에 차례로 몰락하자 경공의 재상이자 고문이 되어 경공을 선도하면서 제나라의 내정 부흥을 이끌고 대외적으로도 소패업이라 할 만한 성과를 이룩했음. 제환공의 패업을 보좌한 관중에 비견될 만한 제나라의 명재상으로 후대에 신료의 사표로 널리 회자되었음. 또한 안영의 사적과 올곧고 뛰어난 경세술을 제경공과의 대화 형식으로 정리한 안자춘추라는 저서가 후세에 저술되어 경세사상의 중요 고전으로 애독되었음.


71. 오거

초영왕(B.C. 540-529 재위) 의 책사이자 충복, 영왕의 겹오 시해와 군위 찬탈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즉위 후에도 영왕을 계속 꿋꿋하게  보필하면서 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았음. 영왕의 야심이 지나쳐 자신의 충언이나 직간이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나 끝내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최후까지 충직하게 보좌했음. 오거의 활약으로 미미한 가문이었던 오씨가 초나라에서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그 아들인 오사도 영왕, 평왕(B.C.528-516 지위) 시기를 통해 많은 공적을 쌓았음. 그러나 후에 천하의 간신 비무극이 오사를 참소함으로써 오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었고 오사의 차남 오자서만이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로 도망쳐 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와신상담하게 되었음.


72. 자산(공손교. B.C.585?-522)

정나라 최고 귀족인 6목(목곡의 직계후손인 6대 귀족 : 공손첩. 곤손채, 공손사지, 공자 비, 공자 발, 공자가) 중 한 사람인 자국의 아들. B.C. 543년에 공손흑이 대부 양소를 사적인 원한으로 살해하자 이 내란을 수습한 후 숙부뻘인 자피의 원조하에 정나라의 국정을 담당하여내정 쇄신, 형벌정비, 도덕교화 등을 추진했음. B.C. 536년에는 중국 최초의 성문법인 형정(형법과 법률 조문들을 새겨넣은 철제이 대정을 주조하여 전국시대에 보편화된 법전 편찬과 법치 확립의 선하가 되었으며, 토지제도를 정비하여 농민생활을 향상시켰음. 이로 인해 집권 3년 만에 정나라 백성들 사이에 자산을 칭송하는 노래가 유행하게 되었음. 제나라의 안영, 진나라의 숙향 등과 함께 춘추중후기의 손꼽히는 현인 정치가였음.


73. 제장공(B.C.553-548 재위)

제나라의 22대 군주로 본명은 광, 부친인 영공 이 애첩 중자 소생의 이복동생 아를 세자로   책립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폐세자가 되었으나, 영공의 와병 중에 최저가 그를 옹립하여 즉위시킴으로써 우여곡절 끝에 군주가 되었음. 원래부터 성격이 황음무도하여 즉위 직후 큰 은혜를 입은 최저에게 전권을 맡긴 채 유희와 환락만을 일삼았음, 최저의 후처이자 절세의미인 당강을 농락함으로써 최저의 원한을 사 마침내 시해되었음.


74. 초영왕(B.C.540-529 재위)

초나라의 26대 군주로 본명은 위이고 즉위 후 건으로 개명했음, 공왕(B.C.590-560 재위)의 아들이고 강왕(B.C.559의 동생. 형 강왕 서거 후 그 아들인 겹오(B.C. 544-541 재위)가 왕위를 계승하자 영윤직을 장악하여 연소한 왕을 겁박하면서 막강한 실권을 누렸음.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조카인 겹오와 그 소생인 공자 막, 평하까지 시해한 후 왕위를 찬탈했음. 본래 야심만만하고 성취욕, 명예욕이 성취욕이 대단하여 초나라의 패권을 재확립하고자 고군분투했음. 장화궁을 축조하여 외국의 망명객을 대거 수송하는 한편 B.C. 534년에는 진나라를 장왕 시기에 이어 2차로 멸국치현하고 B.C.531년에는 채나라를 멸국치현했으며, 이어 허, 호, 심. 도, 방, 신 등 6개 소국을 초나라 내지로 이동시키는 등 (전국시대 이후로는 보편화되었으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책들을 연속적으로 추진하여 대내외의 지탄을 받았음.  부왕인 공왕 시기부터 빠른 속도로 성장해 초나라의 남방 맹주 지위를 위협하던 장강하류의 신흥국 오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수차 원정군을 파견했고, B.C.529년에는 몸소 출정했다가 그 틈을 이용해 동생들인 비. 흑굉. 기질(영왕 사후 평왕으로 즉위, B.C.528-516 재위)이 진, 채현의 군사들과 국내외 주요 반대파들을 모두 규합하여 난을 일으키자 고립무원의 사태를 짐작하고 자결했음. 오랫동안 무도한 군주인 것처럼 폄하되었고 본 소설에서도 패륜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으나 그가 추진한 정책이나 사적들을 볼 때 단순히 패륜무도형의 군주로만 몰아세울 수는 없는 혁신적인 측면들이 적지 않음.


75. 최저

제나라 영공(B.C.581-554 재위), 장공(B.C.553-548 재위) 시기의 권신,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장공이 자신의 후처인 당양을 계속 농락하는 데 대해 원한을 품은 나머지 B.C.548년에 난을 일으켜 장공을 시해하고 가거. 주작. 병사 . 공손오 등 장공의 절친한 가신들까지 대거 처형한 후 공자 저구를 경공(B.C.548-490)으로 옹립했음.

경공 즉위 직후 자신ㅇ은 우상이 되고 공모자인 경봉은 좌상이 되어 경공 초반기이제나라 공실을 농단하고 전권을 장악했음, 이때 태사 백(태사가문의 장남)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5월 을해일에 최저가 주군 광(장공)을 시해했다‘고 직필하자 그를 살해했으며, 그 동생인 중, 숙도 형의 뒤를 이어 직필하자 두 형제마저 죽였음. 그러나 말자마저 역시 죽음을 불사하면서 형들처럼 직필하자 사관들의 필봉을 한탄하면서 잘려주었음. 그로부터 불과 2년 만인 B.C.546년에 전처 아들들인 성, 강과 당강 소생의 명 사이에 종주권과 영읍 계승문제를 놓고 분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이용해 경봉이 계략을 써서 최적 가문을 멸망시키자 운명을 한탄하면서 자살했음.


제8권

76. 공자(B.C.552-479)

춘추시대의 대철학자이자 유가의 비조. 흔히 소왕으로 경칭되는 동방의 대성현. 노나라 장군 숙량흘의 서자로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 젊은 시절에는 노나라의 계손씨 휘하에서 중도읍의 읍재(읍을 다스리는 수장)를 맡아보기도 하고, 정공(B.C.509-495 재위)으로부터 사공직을 제수받기도 했으나 노나라의 혼미한 정치 현실과 삼환씨의 어지러운 전횡에 적잖은 실망과 환멸을 느낀 나머지 노나라를 떠나 B.C.498-484년까지  천하 열국을 두루 유람하면서 각국 군주들에게 치구의 도를 설파했음.

그러나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찾아주는 군주들이 없음을 깊이 한탄한 후 정치에 뜻을 버리고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와 남은여생을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교육하는데 바쳤음. 육경(시,서,예,악,역,춘추)을 정리하고 인의와 효제, 충서 등을 근간으로 하는 도덕 질서의 회복을 지속적으로 설교했는데, 이 내용은 제자들에 의해 그대로 전승되어 유교의 핵심 교조를 이루게 됨. 공자와 그 문하 중 가장 뛰어난 72제자들의 문답과 교훈 내용을 담은 논어가 저술되어 공자사상의 진수를 전하고 있음.


77. 맹영

진애공(B.C.536-501 재위)의 누이로 초나라에 출가한 여인, 후대의 통속소설에 무상공주라는 필명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 애초에는 초나라 세자 건의 부인으로 간택되었지만 초나라의 간신 비무극이 초평왕(B.C.528-516 재위) 에게 아첨하기 위해 그녀를 평왕의 부인으로 삼게 했음. 이에 초평왕은 정실인 채나라 출신의 맹희를 버리고 며느리 뻘인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 왕자 진(훗날의 소왕)을 낳았음. 평왕이 서거한 후 어린 아들 진을 즉위시켜 성심껏 보필했고, B.C.506년에 발발한 오나라 침공의 대국난을 꿋꿋하게 극복하여 초나라를 복국시키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음.


78. 비무극

초평왕~소왕 시기의 둘도 없는 간시. 참소와 아첨, 음모에 능해 언장사와 작당하여 초평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투성연을 죽이고 채 대부 조오를 추방한 일을 시작으로 평왕으로 하여금 며느리를 취하게 하고, 미워하던 세자 건도 쫓겨가게 한 후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며 세자 건의 태부였던 오사부자를 처형했고, 좌윤 백극완을 죽이고 양씨, 진씨 양 집안을 도륙내는 갖은 만행을 저질렀음, 이로 인해 초나라는 급격히 내정이 혼란해지고 국력이 기울어 후에 오나라에 의해 미증유의 국난을 겪게 됨 결국 영윤 낭와와 심윤술에 의해 처형되었으나 초나라에 끼친 악영향은 실로 심대했음.


79. 손무(손자)

오나라 출신의유명한 천재 병법가, 춘추시대뿐 아니라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명전략가이자 군사가., 오자서의 천거로 오왕 합려의 군사로 기용된 후 군기를 엄정하게 다스려 오군을 최정예 부대로 정련했으며, 마침내 B.C. 506년 초나라를 침공하여 신출귀몰한 전술과 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음. 초나라의 도성 영을 점령하고 초를 완전 망국시키기 직전에 진나라의 원군과 오나라의 내란으로 부득이 회군하여 돌아왔으나 그의 전공을 깎기에눈 부족했음. 대승 직후 합려가 내리는 벼슬과 많은 선물을 마다하고 산속으로  은둔해 생애를 마쳐 병법뿐 아니라 흥망의 대도마저 통달했다고 칭송됨. 필생의역작인 송자병법 13편은 중국을 대표하는 병법서의 백미이자 역대 병가의 최고 경전이 되었음.


80. 안영

제나라 경공(B.C.547-~490 재위) 시기의 명재상으로 춘추전국 시대를 통틀어 열 손가락에 뽑힐 만한 현신, 경공을 보필하여 진나라 초나라도 쇠퇴한 상황에서 제나라를 중흥시켜 거의 패업에 맞먹는 성과를 이룩하게 했음.


81. 양호

노나라 삼환씨 중 계손사의가신, 일찍부터 많은 재물과 인력을 자기 휘하에 모아 계손씨는 물론 삼환씨의 가신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음, 그 위세를 믿고 B.C.502년에 자신의 일당들인 계오(계손사의 아우), 공서극(계손씨 일족) 곤산불뉴(계손씨의 가신), 숙손첩(숙손씨 일족), 숙중지 등을 선동해 삼환가를 차지하려고 반란을 일으킴, 삼환씨가 총력을 기울여 반란군을 격파하는 바람에 거사가 실패하자 환양관을 거쳐 제나라로 도주해 제경공에게 삼환씨를 정벌해 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대부 포국이 이를 거절하고 양호를 잡아 노나라에 인도할 것을 청하자 다시금 제나라를 탈출하여 송나라로 도주했음. 송나라에서도 인심을 잃자 진나라로 도주해 조앙의 가신이 되어 진양조씨가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한씨, 위씨와 함께 진나라를 삼분하는데 일정한 공헌을 했음. 자신의 주군인 계손씨와 삼환씨 가문을 타도하고 그 지위를 차지하려고 정변을 일으킨 점 때문에 공자에게 신랄한 비판을 당했고 일반적으로도 간교한 인물로 평가되나, 양호의 이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전국시대에 보편화된 하극상 정변들의 선구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82. 요이

오나라의 협객, 오자서의 천거로 오왕 합려의 신하가 된 뒤 합려의 최대 우환이자 정적인 공자 경기를 죽이기 우해 계략으로 자신의 처자를 죽이고 경기에게 접근하여 목적을 달성했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릴 줄 모르며 더구나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까지도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용협의 전형으로 꼽힘


83. 오자서

초나라의 대부로 오사의 아들, 감신 비무극의 흉계로 부친과 형 오상이 억울하게 처형되자 기필코 초나라를 멸망시켜 부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후 오나라로 도망가 공자 광의 책사가 됨. 오왕 요의 시해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해 광을 오나라 황(합려)으로 즉위시킨 후 초나라 정벌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지휘하여 단시일에 오나라를 군사 강국으로 발전시켰음. 마침내 B.C.506년에 대대적으로 초나라를 침공하여 수도 영을 함락하고 종묘를 불태우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초평왕의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300대나 매질함으로써 사원도 풀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초나라를 완전 멸망시키지는 못한 채 회군했음. 이후 자만에 빠져 나태해진 합려가 월나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 아들인 부차를 지성껏 보필하여 월나라를 B.C.494년에 궤멸시킴으로써 선대의 모욕과 원한을 설치했음. 그러나 월나라의 모신 범려와 문종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마침내 월나라의 이간책과 백비의 참소로 B.C.484년에 자결을 명령받았음. 오자서의 사후 오나라는 계속 군사력이 약화된 끝에 B.C.473년에 월나라에게 멸망당했음.


84. 전제

오나라의 용사로 일명 전설제라고도 함. 오자서가 오나라 공자 광을 위해 천거한 인물로 놀랄 만한 신력을 지녔으나 성품은 유순하고 특히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음. 공자 광이 어머니를 극진히 공대하는 데 감동하여  주인으로 섬기기를 결심한 후 그의 명령에 따라 오왕 요를 시해하고 즉사했음.


85. 초평왕(B.C.528-516 재위)

초나라의 27대 군주, 공왕(B.C.590~560 재위)의 말자이고 본명은 기질, 신탁에 의해 일찍이 공왕의 후계자로 점지되었으나 부왕 사후 왕위를 바로 계승하지 못하고 이보경인 강왕(B.C.559~545 재위)과 그 아들 겹오(B.C.544~541 재위), 또 다른 이복형 영왕(B.C.54~529) 등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음, 영왕 시기에 진, 채나라를 멸국치현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채현의 현공이 되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삼아 진, 채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물론 영왕의 가혹한 멸국치현, 사민정책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 세력들을 폭 넓게 규합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음. 반란이 성공하여 즉위한 후 초기에는 내치와 외교 양면에서 안정, 휴양책을 펼쳐 초나라를 중흥시키는데 기여했으나 후기에는 간신 비무극의 농간에 넘어가 세자 건을 내쫓고 그의 정혼녀인 맹영을 취했으며 충신 오사, 오상 부자를 무고하게 처형하여 오자서(오상의 동생)의 깊은 원한을 사는 등 적지 않은 실책을 저질렀음. 결국 오자서의 와신상담결과 군사강국으로 급격히 부상한 오나라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킴으로써 망국 직전까지 가는 미증유의 재난을 초래했고 그 자신도 관을 들어내어 시신에 매질을 당하는 모욕을 겪었음.



제9권

86. 구천(B.C.496-465 재위)

월왕 윤상(B.C.510-497 재위)의 아들. B.C.496년에 취리에서 오나라 군사와 격돌했을 당시 사형수 300여 명으로 된 결사대를 투입하여 오나라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차례로 목을 찔러 자결하게 하는 전대미문의 계책을 써서 오나라 군사들의 혼을 뺀 뒤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오왕 합려를 사망하게 만들었음. 이 대승리에 만족하여 잠깐 방심한 결과 3년 뒤인 B.C.494년 합려의 아들 부타가 이끈 대규모의 오나라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망국 직전까지 가는 참담한 패배와 치욕을 당하게 되었음. 그러자 이후 날마다 쓸개를 핥으면서 지난날의  치욕을 거듭 상기하고 오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계속 북돋아 보복전을 철저히 준비했음. 그처럼 고군분투한 결과 마침내 B.C.473년에 오나라를 멸국시켜 원수를 갚고 춘추후기 국제질서의주요 축이었던 오, 월  양국의 항쟁을 완전히 종식시켰음. 또한 문종과 범려 양 책사의 보필하에 대내적으로도 내정  개혁과 안정에 힘써 월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중원 국가들에게도 월나라의 위명과 영향력을 널리 알렸음.


87. 백비

초나라 대부 백극완의 아들. 간신 비무극의 흉계로 부친이 억울하게 처형되자 오나라로 도망쳐 와 동병상련의 처지인 오자서에게 의탁했고 그의 추천으로 오왕 합려와 부차를 섬기게 됨. 감언이설과 아첨에 능해 곧은 충정을 지닌 오자서와 계속 대립했음, 결국에는 월왕 구천의 책사인 범려의 꾐에 넘어가 오왕 부차를 오도하게 되었음. 곧 월나라를 대파한 공에 자아 도취되어 부차를 안일과 환락에 빠지도록 만들었음, 그를 계속 저지하고 직간하는 오자서를 참소하여 결국 자결하게 만들었음. 그 결과 오나라의 국방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마침내 B.C.473년에 월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했음. 자신과 일족도 월왕 구천에게 처형당하고 도륙되었음.


88. 범려

월나라의 충신이자 천재 전략가이며 이재가  천문, 역법, 지리, 군사, 전략, 재정 등 모든 방면에 두루 통달했던 박학지사이자 희대의  경세가 월왕 구천을 보필하는 데 견마지로를 다해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오나라 멸망을 실현한 뒤 토사구팽의 세태에 따라 구천이 오나라 멸국공신들을 탄압할 것을 미리 감지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처자와 함께 제나라로 이후 치이자피라 개명하고 제나라 도산에서 목축업을 하여 천금을 벌어들이는 탁월한 이재, 경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춘추전국시대의 손꼽히는 거부겸 대실업가가 되었음. 당대인들이 이로 인해 그를 도주공이라고    존칭했으며 후대에도 그 특유의 이재술은 전통 경제학의 묘책으로서 널리 회자되었음. 사마천이 지은 사기 중의 1편인 화식열전에도  도주공의 이재에 관해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음. 


88. 부차(B.C.495-473 재위)

합려(B.C.514-496 재위)의 아들이자 오나라의 마지막 군주. B.C.496년에 오나라가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대패를 당하고 부친 합려마저 큼 부상을 당해 서거하자, 날마다 딱딱하고 차가운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면서 부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각오로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여 3년 뒤인 B.C.494년에 마침내 월나라를 대파해 궤멸직전까지 가게 했음. 그러나 이후 자신의 공적에 스스로 도취되어 국방과 군사를 소홀히 하고 애첩 서시와 함께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면서 간신 백비의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충신 오자서를 배척하다가 급기야 자결시키는 등 여러 가지 실정을 저질렀음. 그 결과 절치부심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군사를 정련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온 월왕 구천의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B.C.473년에 나라를 잃는 비극을 당하고 자결했음.



89. 서시

저리산 서촌에 거주하던 시씨의 딸로, 춘추시대 월나라의 절세미녀, 오나라를 멸망시켜 치욕을 갚으려는 월왕 구천의 계책에 따라 오왕 부차를 홀려서 타락시키는 임무를 담당하게 하기 위해 선발되었음.

오나라에 진상된 후 오왕 부차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관왜궁, 향섭랑, 완화지,,완월지, 오왕정, 서시동, 채련경(연꽃을 따는 호수),금범경(비간 돛배를 타고 놀던 호수), 장주원 등이 오로지 서시와 오왕 부차의 유희를 위해 축조되었을 정도로 온갖 부귀영화와 지상의 향략을 한 몸에 맛보았으나 오나라가 멸망하자 그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음.


90. 예양

지요(지양자, 지백의 가신, 조양자가 한씨, 위씨와 연합하여 지요를 죽이고 지씨의 영읍을 삼분했을 때 몸을 피해 달아났으나, 후에 조양자가 지요의 두개골을 변기로 사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분기충천하여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두 차례나 조양자를 암살하려 했음. 두 차례 모두 실패하자 조양자의 도포를 대신 칼로 벤후 자살했음. 춘추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열사


91. 위문후(B.C.445-396 재위)

한호, 조맹(조무휼과 함께 진공실을 삼분해 위나라를 세운 개조 위구(위환자:B.C.?-446)의 아들이자 신흥 위나라으 2대 군주, 본명은 사. B.C.403년에 한건, 조적과 함께 주 위열왕에게 정식 제후 지위를 승인받은 후 안읍에 도읍해 국가체제를 정비했음. 곧 법가인 이회를 등용하여 내정 개혁을 실시하고 법전을 정비하며 평적법(나라에서 해마다 추수 직후에 곡식을 시가보다 약간 비싸게 사들여 비축해두었다가 춘궁기나 bd년에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싸게 방출한 s제도, 곡가 조절 및 빈민 구휼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서문표를 등용해 업 땅의 폐습을 없애고 장수 12거를 개척해 그 일대 의 농업 생산력을 제고시켰음. 또 오기를 등용해 하서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 문무 양면에서 큰 치적을 올려 위나라를 같은 삼진 국가인 한, 조보다도 빠르게 발전시켰음. 위문후의 치적으로  위나라는 전국시대 전반기의 패권 국가로 부상하게 됨.


92. 자서

초나라 소왕말기-혜왕 초기의 영윤, 두터운 충정과 명철함을 지닌 현신으로 오나라 군사의 침입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국란을 극복하고 망국직전의 초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음. 난리를 물리친 후 국가를 재건하고 내저을 안정시키면서 두루 선정을 베풀었음. 그러나 평왕의 폐서자 건의 아들이자 정나라에 개인적인 원한을 지닌 백공 승이 정나라정벌을 요청하는 것을 국내외 사정을 고려해 거절했다가 후에 승이 내란을 일으켰을 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음.


93. 조앙

진나라의6대 세경가(대대로 경의 지위를 계승한 유력한 귀족 가문)의 하나인 조씨 문벌 중 정파인 진양조씨의 종주로, 조성(조경자의 아들이고 시호는 조간자, 진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쉬 B.C.490년에 진양조씨의 경쟁 세력인 한단조씨를 멸하고 그 근거지인 한단조가 등을 진양에 합병함으로써 조씨 일문을 통일해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함. 또한 한불신, 위만다, 지역 등과 협력하여 범씨. 중행씨를 멸문시킴으로써 기존의 6경 경쟁체제를 4경 경쟁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음. 조앙의 활약을 토대로 그 후계자인 조무휼(일명 조맹, 조양자) 시기에 진양조씨는 한씨, 위씨와 함께 진나라를 삼분하여 B.C.453년에 스스로 제후 지위에 올랐음(전국시대의 개막)


94. 조무휼

진양조씨의 종주이자 조앙이자 조앙의 아들로 시호는 조양자, 원래 천첩의 몸에서 태어난 말자였으나 워낙 총명하여 부친 조앙이 정실 소생의 장자들을 제치고 후계자로 삼았음. 진공실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은 지요(지양자ㅡ지백)가 한씨, 위씨에 이어 조씨에게도 땅 100리르 요구하자 그를 거절한 뒤 진양성에서 지씨, 한씨, 위씨 연합군의 공격을 1년 이상 막아내다 한씨, 위씨를 포섭해 지요를 죽이고 지씨 일족을 모두 도륙한 뒤, 한씨, 위씨와 함께 지씨의 영읍을 나눠 가짐. B.C.453년에 마침내 제후위에 올라 조나라를 건국했음.


제10권

95. 방연

위나라의 장군, 손빈과 함께 귀곡 선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다가 위나라로 출사하여 장군 지위를 얻게 됨. 천성이 탐욕스럽고 음흉하여 동문수학할 때부터 자신보다 뛰어난 손빈을 은근히 시기하고 경원시했으며, 출세한 후에도 손빈을 천거하지 않고 멀리 했음. 자신이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손빈이 묵자의 천거로 위나라에 입사하게 되자 간악한 계교를 써서 손빈을 제나라의 첩자로 몰아 월형(발목을 자르는 형벌)과 묵형(얼굴에 글자를 뜨고 먹을 넣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도록 하는 형벌)을 당하게 하여 폐인처럼 만들었음. 우연히 방연의 간계를 알게 딘 손빈이 정신병자 노릇을 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다가 다시금 묵자의 도움으로 제나라 장군 전기에게 구출되어 몰래 위나라를 탈출해 제나라로 가서 군사가 되었으나 방연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숙적 손빈을 죽였다고 안심하고 있었음. 그후 손빈의 활약으로 B.C.353년의 계릉전투. B.C.341년의 마릉전투에서 위나라가 제나라 군사에게 대패를 당하게 되고 마릉전투에서는 방연 자신도 손빈이 만든 함정에 빠져 죽음.


96. 상앙(B.C.390-338)

본명은 위앙으로 전국시대 법가를 대표하는 인물. 위나라 공실의 후예로 위나라에서 관직을 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진나라로 가 효공에게 패업을 달성하는 방법을 유세하고 큰 신임을 얻어 좌서장에 임명되었음. 이후 내정 개혁의 전권을 부여받고 B.C.356년(359년이라는 설도 있음) B.C.350년에 2차에 걸쳐 대대적인 변법을 추진하여 빠른 시기에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달성했음. 그로써 서방에 치우친 관계로 춘추 중기의 목공(B.C.69-621 재위)시기 외에는 주도권을 잡은 적이 없는 이류 국가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무서운 기세로 성장시켜 중원을 위협하는 최고 군사강국으로 만들었음. 그러나 지나치게 인정없고 가혹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민심을 얻지 못했고 그로 인해 효공사후 반대파들의 탄핵을 받아 도주하던 중, 자신이 수립해놓은 빈틈없는 치안제제에 걸려 체포되어 능지처참 당했음.


97. 소진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세가로 주나라 낙양출신이고 손빈, 방연, 장의 등과 함께 귀곡선생 문하에 있었다고 함. 중국 서쪽 변방에 치우쳐 춘추 중기 이래 중원 국가들의 경재에서 소외도이ㅓ 있었던 진나라가 전국 중기에 상앙 변법(B.C.356과 350년)을 시행하여 급속도로 부국강병을 이룩하면서 중원 국가들을 충분히 위협할 정도의 군사대국으로  강성해지자, 진의 동방에 있는  한, 위, 조, 제, 초, 연 의 6국이 상호 연합하여 진을 제압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합종책을 제시했음. 이로써 조나라의 숙후를 비롯한 6국 군주들의 열렬한 환영과 후원 아래 한동안 반진 연대를 이끌면서 영화를 누렸으나 동상이몽인 6국을 인위적으로 결합시켰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나 안정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합종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그 결과 6국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채 비참한 말로를 맞았음.


98. 손빈

본명은 손빈, 전설상의 천재 병법가인 귀곡선생의 문하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수제자, 오왕 부차의 군사로 초나라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손무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음. 귀곡선생이 그 재능을 알아보고 손무가 지었으나 밀리에 전수되어 세간에는 아려지지 않던 손자병법 전체 내용을 전수해주었다고 함(이 이야기는 전설이고 실제 그랬는지 여부는 불확실함). 묵자의 추천으로 위나라에 출사했으나 동문수학했던 방연이 그의 재주를 시기한 나머지 제나라의 첩자로 참소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월형과 묵형을 당하고 폐인이 되었음. 후에 우연히 방연의 간계를 알게 된 손빈은 정신병자 노릇을 하면서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다시금 묵자의 도움으로 제나라 장군 전기에게 구출되어 사지를 무사히 탈출했음. 그후 제나라의 군사로 활약하면서 B.C.354년의 계릉전투, B.C.341년의 마릉전투에서 위나라 군사를 대파했고, 특히 마릉전투에서는 방연을 함정에 빠뜨려 죽임으로써 사원까지 해소했음.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고 제나라를 강성하게 만든 후에는 속세를 버리고 산야에 은둔했는데, 일설로는 귀곡선생과 함께 선계로 갔다고도 함. 1972년에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가 위치했던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에서 발굴된 전한시대(B.C.206-A.D.8) 귀족묘에서는 손무가 지은 손자병법과는 전혀 별개의 저서인 손빈병법(손빈이 자찬한 병법서로 추정)이 기록된 죽간들이 대량 출토됨으로써 전국 시대의 병가 사상의 단계적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둘도 없는 획기적인 자료가 됨 


99. 오기

위나라 출신의 장군이자정치가, 개혁가, 위나라에 출사하여 위문후(B.C.445-396 재위) 후하에서 하서땅의 태수를 역임하면서 서방 방어에 큰 공을 세웠으나 문후 사후 정적들의 참소로 B.C.390년 무렵 초나라로 도주했음. 이전부터 그의 명성을 흠모하던 초나라의 도왕(B.C.401-381 재위)은 그를 영윤(초나라 재상)으로 삼고 전권을 주어 개혁 정책을 실히하도록 했음. 이에 공족, 세족들의 권리와 지위를 대폭 축소할 것, 불필요한 관직과 작록을 과감하게 삭감하고 정리할 것, 관료, 세족 봉군들의 작록 세습을 3대까지로 제한할 것, 군대를 강화할 것. 건축술을 비롯한 각종 신기술들을 외국으로부터 개방적으로 도입할 것 등등 각종 혁신적인 변법들을 반대파의 격려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강력하게 추진했음. 그 결과 춘추 말기 이후 다소 정체내지 쇠퇴의기미를 보이던 초나라는 빠른 시일 내에 부국강병을 재달성함으로써 진을 제압하고 패권 국가로 부상할 새로운 기회를(일시적이나마)잡게 되었음. 그러나 열렬한 후원자였던 도왕이 서거하자 국상을 틈타 대거궁중으로 몰려온 초나라의 공족, 세족, 관료들이 오기를 암살함으로써 뜻을  더 이상 펴지 못했고, 초나라도 전국 초기에 패권 국가로 부상하여 천하통일을 쟁취할 가능성을 무산시켜 버렸음.


100. 전기

제나라의 장군 겸 재상, 위나라에서 방연의간악한 계략에 희생되어 월형과 묵형을 당하고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 손빈을 구출해와 군사로 등용한 뒤 손빈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책략을 적극 수용하여 제나라 군사를 정련하고 정예부대로 정련했음. 그로 인해 B.C.353년의 계릉전투와 341년의 마릉전투에서 위나라 군사를 두 차례나 대파하는 대공을 세웠음.


101. 종리춘

제나라 무염 출신의 추녀. 비록 추녀이긴 하지만 남자 못지않은 기상과 담대한 야망, 깊은 지혜 및 국가 통치술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지닌 당대의 여결이었음. 그 무렵 제선왕(B.C.319-301 재위)이 선대의 공업과 제나라의 부강에 도취되고 자만한 나머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나태와 안일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알현하여 패업의 도를 역설했음. 그래서 선왕이 크게 깨닫고 기뻐하여 종리춘을 왕후로 삼았다고 함. 한 대의 대유 유향이 지은 <열녀전>에 그 상세한 행적이 실려 있음.


제11권

102. 굴원

초나라의 대신이자 애국시인.시경과 함께 중국ㄱ 고대의 2대 시가집이라고 하는 초사의 저자(시사로도 병칭), 초나라의 회왕(B.C.329-299 재위), 경양왕(B.C.298-263) 재위)의 2대에 걸쳐 봉직하면서 애국 충정을 다했으나, 공자 난과 근상 등의 참소로 경왕왕의 의심을 사서삭탈관직 당했음. 이후 초나라의 국세가 기울어가고 조정에는 간신들만 득세하는 상황을 한탄하고 슬퍼하다가 멱리수에 몸을 던져 자살함. 굴원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그가 투신자살한 5월 5일에는 역리수에서 경도회(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주, 누가 굴원의 시체를 빨리 건져오나 내기하는 의미임)를 개최하고 채색 비단줄에음식을 매달아 강물에 넣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음.


103. 맹상군

제나라의 공족이자 대부호로, 제선왕(B.C.319-301 재위)의 동생인 전영의아들ㄹ이자 민왕(B.C.300-284 재위)의 사촌 형제, 본명은 전문. 제나라 선왕, 민왕 시기에 정승직을 역임하면서 제나라의 내정을 담당했음. 위나라 신릉군, 조나라의 평원군, 초나라의 춘신군과 함께 천하의 선비들을 널리 사랑하고 그들을 휘하의 문객, 빈객으로 삼아 정성껏 우대함으로써 “전국사군자”로 널리 회자 됨. 그러나 보통 맹상군의 빈객 양성이 규모면에서나 인덕면에서 여타 삼군보다 훌륭하다고 평가되므로 전국 사군자 중에서도 수위로 꼽힐 만함. 천성이 너그러운 데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신비한 친화력을 지녀, 천첩의 소생이면서도 가문의 휴계자가 되었고 이후 재산을 아끼지 않고 천하의 모든 선비들을 재능, 인품, 출신 성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폭 넓게 받아들이면서 동고동락했음. 그 보답으로 진나라에 초빙되어 갔다가 잘못되어 처형당할 뻔한 위기 상황에서 휘하 빈객들의 계명구도로 무사히 구출되기도 햇음.


104. 악의

연나라의 명장, 제나라가 은황실의 혈통을 이은 유서 깊은 중원 국가인 송나라를 멸망시킨 것(B.C.286)에 대해 충격을 받은 한.위.조. 진.연의 5개국이 견합 단결하여 B.C.284년에 제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을 때 총사령관이 되어 제나라를 궤멸시켰음.


105. 염파

조나라의 백전 노장이자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용장 겸 의인, 신묘한 책략과 지혜, 달변으로 정승 지위에 오른 인상여를 처음에는 미워하다가 인상여의 깊은 도량을 알고는 감복하여 문경지교(목에 칼이 들어와도 배반하지 않을 깊은 우정,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우정)를 맺게 되었음. B.C.260년에 진나라 대군이 조나라를 총 공격했을 때 용의주도하고 신중한 방어책을 세워 대처하면서 원정을 나온 진나라 군사가 지치기만을 기다리는 지구전을 구사했으나

진의 승상 범저의 이간책과 이를 그대로 믿은 조나라 효성왕 및 조정 신하들에 의해 파직되었음. 그 후임으로 조괄이 부임하여 성급하고 무모한 공격을 펼쳤고, 이로 인해 조나라는 장평 대전에서 대패했을 뿐 아니라 45만이나 되는 군사들이 하룻밤 만에 몰살당하는 대참극을 당하게 됨.


106. 인상여

조나라의 명신이자 책략가, 혜문왕 시기에 천하의 보배인 화씨의 옥(초나라 변화가 발견하여 초문왕에게 바쳤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보옥, 그 후 우영곡절 끝에 조나라로 흘러오게 되었음)을 두고 조나라가 진나라에게 곤란한 협박을 당했을 때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용기와 지혜로 진나라 소양양의 무리한 요구를 슬기롭게 거절함. 이후에도 위기 때만다 진나라와의 외교에서 비상한 수완과 능력을 발휘하여 진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국익을 지켰음. 그 공로로 재상 지위에 올랐는데, 장군 염파가 이를 시기하여 공공연히 욕하고 헐뜯었지만, 국가를 위해 사사로운 싸움을 자제하는 아량을 보임, 후에 그의 깊은 도량을 알게 되어 감읍한 염파와 문경지교를 맺게 되었고, 이후 양인 서로 협력하여 조나라를 진의 위협으로부터 굳건히 지킴, 관중과 포숙아 의 관포지교와 함께 고금을 대표하는 깊은 우정으로 널리 회자 됨


107. 전단

제나라의 명장이자 공족의 후예, 연나라 장수 악의가 이끄는 5국 연합군의 총공격에 의해 제나라의 70여개 성읍이 한꺼번에 함락되는 전무후무한 국란을 겪을 당시 즉묵 태수를 역임하면서 망국 직전의 제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음. 세자 법장이 거주 땅에 피신해 있는 사실을 알고 그를 영입해 양왕으로 즉위시킴. 그후 참소와 유언비어에 의해 당대의 명장 악의가 연나라로 소환되고 기겁이 제나라에 주둔하게 되자 그 틈을 타 신묘한 작전으로 연나라 군사를 대패시킴. 이에 호응하여 제나라 70여 개 성이 일제히 독립함으로써 연나라 세력을 제나라에서 완전히 축출한 데 특등 공신이 됨. 제나라를 수복하고 수도 임치에 입성한 후에도 양왕을 도와 국정을 훌륭하게 운영함.


108. 조사

조나라의 현명한 노장군, 매우 신중한 성격으로 수다한 전투에서 매번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추호도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않고 병법과 군사 문제를 언제나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었음. B.C.269년에 호양이 이끄는 진나라 대군이 한나라의 상당 땅을 점령하고 알여 지역까지 점령했을 때, 이를 구원하러 가서 지형을 십분 활용한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작전을 펼쳐 진에대승을 거둠으로써 위기에 처한 한, 조 양국을 구원했음. 그 공으로 마복군에 봉해지고 죽을 때까지 최고의 작록과 명예를 누렸음.


109. 춘신군

초나라의 대부로 본명은 황헐, 초나라의 태자 웅원(경양왕의 아들)의 태부(스승)를 역임했을 당시 태자가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자, 그를 수행해 가서 온갖 고초를 함께 겪었음. 진나라가 초나라를 위협하기 위해 태자 원을 없앨 기미를 보이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비빌리에 태자를 탈출시켜 고국에 돌아가 고열왕으로 즉위하도록 도움.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긴 진의 소양왕이 석방해준 덕분에 무사히 초나라로 돌아와 영윤(초나라의 재상)이 되어 고열왕을 지성껏 보필함, 이후 강동 땅을 분봉받고 춘신군이라는 봉호를 하사받으면서 초나라에서 최고의 명예와 부를 누리게 됨. 제나라의 맹상군, 위나라의 신릉군, 조나라의 평원군을 흠모해  그들처럼 수많은 빈객들을 양성하는 한편, 초나라의 내정을 쇄신하고 군법, 행정 편제, 법전 등을 정비해 쇠퇴일로에 놓인 초나라를 마지막으로 부흥시키고자 노력했음. 이로부터 초나라도 급속히 쇠퇴함.


110. 평원군

조나라의 8대 군주 무령왕(B.C.325-299 재위)의 아들이자 군주인 혜문왕(B.C.298-266 재위)의 이복형, 제나라의 맹상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과 함께 전국 사군자로 널리 회자됨, 널리 인재를 구하고 선비를 양성하여 어진 덕과 신의를 만방에 떨쳤음. 특히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을 참하여 선비들과 모든 사람들을 차별없이 공평하게 대우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과 진나라 승상 범저의 원수인 위제를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보호해준 것 등은 유명한 일화로 꼽힘.


제12권

111. 번오기

진나라의 장군.B.C.239년에 진왕 정(진시황)이 동생인 장안군 성교를 파견해 조나라의 요충지인 상당 땅을 공격하게 했을 때 그 휘하 장수로 출전했는데 평소 여불위의 비행과 전횡을 미워해오던 차에 이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유약한 장안군을 적극 설득하여 둔류에서 진왕 정과 여불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음. 사실상 번오기가 지휘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반란국은 “여불위 소생인 진왕 정에게는 복종할 수 없으며 진정한 영씨 군주를 세워 왕통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명분을 내세웠으나, 대노한 진왕 정의 신속한 대처로 곧 진압되어 장안군은 처형되고 번오기는 연나라로 도망쳤음. 연나라에서 계속 세자 단의 보호를 받았으나 전국 시대 막바지인 B.C.227년에 세자 단이 진나라를 응징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객 형가를 보내 진왕 정을 암살하려 했을 때 진왕 정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당시 엄청한 현상금이 걸려 있는 번오기의 목이 필요했음. 이를 알고 스스로 자기 목을 끊어 형가에게 바쳤으나 결국 형가가 암살을 실패함으로써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음. 번오기의 반란은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진나라에서 발생한 최후의 내분이자 무시 못 할 정치적 위기였으나, 번오기와 형가의 죽음으로 일단락되면서 진은 통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음. 


112. 신릉군

위나라의 공족이자 대부호로 안리왕(B.C.276-243 재위)의 동생이고 본명은 무기, B.C.276년에 형인 안리왕에 의해 신릉군으로 봉해졌음.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초나라의 춘신군 등과 함께 수많은 문객, 빈객들을 정성껏 부양하고 우대함으로써 보통 “전국 사군자”로 널리 회자됨. 사군자들 중에서도 병법과 전술에 가장 뛰어나 위나라를 위해  많은 군공을 세웠고, 맹상군 평원군 등과 도 깊게 교류하면서 전국 말기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을 잘 헤쳐나갔음. 특히 B.C.257년에는 안리왕의 병부를 훔쳐내는 비상수단을 쓰면서까지 위나라 군사들을 동원해 조나라를 구원하고 진나라 군대에게 대승을 거둠으로써 천하의 칭송을 받게 되었음. 그러나 이후 그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견제한 안리왕과 수많은 반대파들의 침소에 환면을 느낀 나머지 현실정체에 흥미를 잃고 주색에 빠져 실의에 찬 여생을 보냈음. 휘하 문객들과 함께 병법, 군사 전력, 천하 경영에 관한 내용을 담은“위공자병법”21편을 편찬했다고 하나 이 책은 전하여 지지 않음.


113. 여불위

조나라 출신의 대상임, 세상의 흥망성쇠를 읽는 눈과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판단력이 매우 비상했음. 일찍이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의 왕손 이인(일명 자초)을 우연히 보고 나서 그가 기화(기묘한 보배)임을 첫눈에 간파하여 이후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끝에, 마침내 그를 장양왕(B.C. 249-247 재위)으로 재위하도록 만들었음. 장양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승상이 되고 문신후로 봉해져 낙양 부근의 식음 10만 호를 받음으로써 , 진나라는 물론 천하 제일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게 됨. 이후 자신의 권세를 믿고 한없이 방자해져 자신이 이전에 장양왕에게 헌납해 왕후로 삼게 했던 옛 애첩(진시황의 어머니, 진시황은 장양와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과 불륜행각을 벌이는 한편, 군사권과 인사권을 농단하여 한때 진나라를 영씨가 아닌 여씨의 나라로 만든다는 비난까지 들었음. 진시황이 장성한 후에는 점차 실권을 잃어가다가 결정적으로 B.C. 238년에 자신이 황태후의 또 다른 정부로 천거한 노애가 일으킨 반란에 연루되어 모든 봉호와 작록을 삭탈당하고 진시황에게 rU속 겁박당하면서 쫓겨다닌 끝에 자결했음. 천하제일의 부귀를 누릴 당시 전국 사군자의 사례를 흠모하여 자신도 휘하에 수천명의 빈객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천하고금의 치란과 목민의 문제를 심도있게 토론하게 하여 그 성과를 “여씨춘추”라는 책으로 집대성하기도 했음.


114 왕전

진나라의 백전노장, 천하통일의 최대 난적이자 남방ㄱ의 강대국인 초나라를 정복하기위해 진왕 정이 자문을 구했을 때 60만 대군이 아니면 곤란하다고 응답했음. 이 말을 들은 진왕 정은 노장군이라 겁이 많다고 생각하고 이신과 몽무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도리어 항연이 이끄는 초나라 대군에게 대해 당했음. 이에 진왕 정은 왕전의 주장대로 60만 대군을 주어 초나라를 재차 공격하게 한 결과, 마침내 B.C. 223년에 대승을 거두고 초나라를 멸하여 그 지역에 초군을 설치했음. 개선 후 왕전은 정치에 욕심을 내지 않고 진왕으로부터 많은 전답과 저택을 하사받아 명철보신 하면서 안락하고 평온한 여생을 보냈음.


115. 이목

조나라의 명장 중이 명장이자 말  그대로 동량지신 B.C.243년에 연나라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무수, 방성 땅을 함락하고, B.C.233년에 진나라 군사들을 적여, 의안에서 대파했으며, B.C.232년에도 역시 진의 대군을 업과 번오에서  대패시켰음. 또 B.C.229년에는 노장 왕전이 이끄는 진의 대군이 한단으로 총출동하는 초비상 사태 하에서 진나라 군사를 대패시켜 멸망의위기를 극복하는 등 열거하기 힘들 만큼 수많은 전공을 세워 나라를 지켜냈음. 그러나 이목이 있는 한 조나라를 패배시키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진이 조나라의  간신 곽개를 매수하여 그에 대한 이간계를 쓰지 이목은 할 수 없이 위나라로 도망쳤고 이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위나라에서 일생을 마쳤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진나라는 B.C.228년에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조왕 천을 사로잡고 조나라를 사실상 멸국 시켰음.


116. 이사

전국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법가 사상가이자 정치가, 한비자와 함께 유가의 집대성자인 순자에게서 사사했음. 진왕 정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책사가 된  뒤 법치주위를 정착시키고 성문법 체계를 강화하고자 고군분투했음. 진의 통일과 함께 제국의 승상이 되어 군현제 실시, 화폐, 도로, 도량형 통일과 분서갱유 정책들을 입안하거나 권고했음. 정치적으로 많은 치적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권모술수에 능했고, 시기심이 강하여 동문수학했던 한비자를 자결시키기도 했음.


117. 진시황(B.C. 246-210 재위)

진나라의 36대 군주로 장양왕의 아들이면 본명은 정. B.C.247년에 부친 장양왕이 서거한 후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초기에는 승상 여불위의 보필을 받았으나 장성하면서부터 점차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음. 중국 역사상 가장 의욕적이고 명민하며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서 내로라하는 문무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면서 전국 말의 혼란상을 종식시키고 6국을 각개 격파하여 마침내 B.C.221년에 중국 역대 황제들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할 만한 천하통일을 달성했음, 통일을 이룬 직후 스스로의 공업을 상고 황금시대의신화적 성군들인 삼황오제의 업적과 견줄 만하다고 자부하면서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제정하고 “시황제”라 지칭했음. 이어 신흥  진제국의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국을 36군과 1400여개의 현으로 편성하고 각지에 군태수와 현령을 파견하여 일찍이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었던 거대 규모의 중앙집권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문자, 화폐, 도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국론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법가 일변도의 강력한 사상통제 정책을 실시했음(분서갱유), 또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조,연,중산 등이 부분적으로 건축했던 북방의 장성들을 대대적으로 증축, 신축하여 유명한 만리장성을 상당부분 완성했으며(오늘날의 만리장성은 명대에 최종 완성된 것임),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어머어마한 규모의 여산릉과 아방궁 등을 축조하게 하여 민력을 고갈시키기도 했음. 자신이 이룩한 신흥 통일제국이 만세까지 유지되기를 기원한 나머지 말년에는 신선술과 불로장생술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자연의 섭리만은 정복하지 못해 통일을 이룬 지 불과 11년 만인 B.C.210년에 지방 순수 도중 서거했음. 고금에 보기 드문 강력한 키리스마와 통치력을 지녔던 진시황이 사망한 후 진제국은 그 업적을 계승할 만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채 한순간에 와해되어 불과 5suis 만이 B.C.206년 만에 멸망했음.


118. 한비자

한나라의 공자, 전국 말의 대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대유인 순자 문하에서 수학했고 전국 시대에 각 지역에서 발전한 법가 이론들을 집대성하여 법가사상의 큰 체계를 세웠음, 곧 신불해(B.C.440-337)의 술(구주의 관료 통제술)과 상앙(B.C.390-338)의 법(무차별적인 성문법의 적용과 준수, 극단적인 법치주의(,m 시도(B.C.350-275)의 세(군주의 도덕성보다 존엄한 위세가 권력 유지의 비결이라는 주장) 등을 종합하여 법가적 통치 이론을 확립한 후, 그것을 저서인 한비자를 통해 계통적으로 피력했음. 워낙 날카롭고 논리적인 명문장으로 유명하여 진시황이 한비자를 읽어보고 감동하여 흠모하게 되었다고 함. 이 소문을 들은 한나라의 마지막 군주(안(B.C.238-230 재위)은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진시황의 환심을 사서 한나라에 대한 공격을 늦추고 대신 조, 위나라부터 정벌하도록 설득하여 시간을 벌어보고자 했음. 그러나 한비자의 재능을 시기한 이사가 진시황에게 한비자를 참하여 투옥시킨 뒤 계속 겁박을 가해 자결하도록 함으로써, 한왕 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위대한 사상가인 한비자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음.


119. 형가

연나라 출신의 자객, 제나라 경봉의 후예라고 전해지며 전국 말에 천하 각국을 두루 유람하다가 연나라에 정착하여 살던 중 전광에 의해 세자 단에게 천거되었음. 진왕 정을 죽여 연나라를 지키고자 염원했던 세자 단은 형가를 극진히 우대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은 후 진왕 정의 암살을 청탁했음. 이에 형가는 징왕 정이 많은 현상금을 내걸고 찾고 있는 진나라의 반역 장군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의 요지인 독항 땅의 지도를 들고 진나라로 가서 진왕 정을 알현했음. 알현 도중에 기회를 보아 진왕을 시해하려 했으나 그만 실수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당했음. 대노한 정은 그 즉시 연나라를 공격해 멸국시키고(B.C.222) 연왕 희에게 사건의주모자인 세자 단의 시체를 바치게 했음. 이 사건을 고비로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사실상 시간문제가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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