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민족의 혼이 담긴 강화도 전등사를 가다.

운학처사 2010. 1. 14. 21:07

  민족의 혼이 담긴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안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종해루(남문) 

 

  ※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풍매화이기 때문에 2~4km 이내인 경우도 열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이에 대한 전설은 전등사홈페이지에 기록되어 있음). --- 수나무이기 때문이리라.

 

 

 

 

 법고와 범종이 한 누각에 있어서 인지 루의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 따로 있는 경우도 있다.

 

 

 

 범종각

 

 

정족산성(삼랑성- 단군의 세아드님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음) 서쪽에 있는 작은문

 

 

 

 

 

남문(종해류)를 성안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

 

 백설속의 연등이 더욱더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다.

 

 

 

 

 

불교를 좀 더 알아보고자 초등학생들이 동계불교학교(Temple Study)에 참여한 것이리라, 스님께서 범종도 울리어 들리어주고 법고도 치는 방법을 설명하여주고 있다. 일반 사람들도 미리 종무소에 신청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불교에 귀의한 사대 천왕의 복속신인 나찰 혹은 아수라, 야차  같은 악귀가 대웅보전의 4귀를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글쎄요?

 

 

 

 

 

 

범종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이 종은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정족산성 정상에서 본 전등사 전경

 

 

 

사진의 중앙 오른쪽에 있는 안내판 후면 위쪽(숲속)이 가궐지 터이다 어느날엔가 모습을 갖추지 않을까?

 

 

 

스님들의  생활하는 집(요사)으로 반지하,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사롭고 한정된 사찰부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대단히 합리적이다.

 

 

몸은 비록 나무로 되었지만

그대 학이 되었군요

그대 학이 되던날 새생명을 얻었으니

백설과 청죽이 그대의 고결함을 더욱 빛나게 하는 고녀

그대 수명(樹命)을 넘어 천년을 살리라. 

-220-

- 죽염다원의 정원에 있는 송학(松鶴) - 

 

 

 부도

남문 종해루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왼쪽 언덕으로 부도전이 나온다. 이곳에는 서운 큰스님을 비롯해 그 동안 전등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내가 청산과 백운사이에 이르니 그림자와 실체도 없고 모양까지도 없도다

 또한 서운 스님은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비록 형상없지만 두드리면 곧 신령스러움 있고

  삼독을 화탕지옥에서 평생을 지냈다.

  이제 몸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차가운 달, 빈산이 진리의 몸이로다.

공교롭게도 스님은 출가일과 득도일, 열반일이 똑같았다. 스님은 세수 아흔셋, 법랍 마흔다섯 해로 열반에 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