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보문사(강화석모도에 있는)를 찾아서

운학처사 2010. 1. 17. 23:49

보문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낙가산(낙가는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이름이고, 보문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없이 몸을 나투시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 산과 절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한다고 함)에 있으며,

이 절은 전에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 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보문(普門)'이란 뜻은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몸 전체의 온갖 덕(德)을 보(普)라 하고, 쓰임을 나타내는 곳을 문(門)이라고 하므로 보문은 보살이 일체 성덕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기회와 시기를 따라 그 효용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했다고 하며, 이 마을에 살던 한 어부가 그물을 쳤다가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건져올렸는데 꿈에 나타난 스님이 일러준 대로 현재의 석실(石室)에 봉안했다는 전설이 있다. 1812년(순조 12)에 홍봉장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으며, 1893년(고종 30)에는 민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법당·관음전·나한전·대방·종각·석실 등이 있다. 특히 이 절의 역사를 대표하는 순례지인 석실(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의 입구에는 3개의 홍예문이 있고, 동굴 내에는 반원형의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했는데 그 사이에 있는 21개의 감실(龕室)에는 석불을 안치했다.

 

일주문

무릇 어떤 절이든 이 일주문의 형태는 있기 마련인데, 보문사 일주문처럼 대개는 목조 건물 형식을 띠고 있다.

칸수는 한 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현판에 쓰여진 `낙가산 보문사'라는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작품이다.

 

 가람 본전을 향해 올라가다 오른쪽의 풍경이 아름다워 담아보았다.

 

좌측에 있는 건물이 법음루이고, 우측에 있는 건물이 범종각으로 고 육여사께서 화주가 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천년고찰 답게 주위의 고목이 이목을 끈다.

 

 천년을 바라보는 느티나무  두 그루 아랫 부분에 석실이 보이고, 상부 멀리에는 관음좌불상이 있는 눈썹바위가  보인다.

 가까이에 범종각, 좀 멀리에 법음루가 보임. 

마애좌불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올라갈 때는 쉬엄 쉬엄 올라가는 것이 좋다.  특히 오늘 같이 추운 날에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각별히 조심하여 할 일이다. 

 

 눈썹바위로 올라가다가 극락보전 옆에서 전면을 향해 한 컷, 뒷 모습을 담아보았다.

 뒷 모습도 아름답다.

 

 저 멀리 소동도, 대송도가 보이고 좌측에 극락보전,  가운데에 삼성각, 우측에 와불전 그 옆에 500나한전이 보이고 법음루 지붕도 보임. 

눈썹바위에 있는 마애관음좌상으로 가다가 앞에 보이는 바다를 바라본다. 쉬어 가기겸 하여, 고압철탑과 고압선이 보인다. 소송도(앞에 보이는 첫번째 섬), 대송도를 거처 아차도, 주문도, 볼음도까지 연결되어 있으리라.(끝에 있는 지도 참조-마우스 클릭시 원본크기)

 

시간이 여의치 않아 사진에 담아 귀가후 조용히 일독하고자 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사찰의 건립 및 중창에 관한 내용을 적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 낙가산보문사중창불사공덕비문(洛迦山普門寺重創佛事功德碑文) - 공덕비이다.

위 좌측에 법고루(법음루), 오른쪽이 범종각이다.

 

  오백나한. 

역사가 아주 짧은 나한상이다.

500개에 해당하는 나한상들이 각기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수와 특징을 다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편안한 마음을 가지도록 한다. 특히 우뚝 솟은 석탑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비슷한 감을 주며 돌이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어느날엔가 보문사의 명물이 되리라.---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하다.

 

  

 와불전 전경

와불전에 있는 와불(누워있는 부처)이다. 불교의 석조물들이 어찌 그렇게 부드러운 감을 주는 지 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기상대발표에 따르면 오늘이 금년 들어 제일 추운 날이라 한다. 스님의 불심을 막을 길은 없는 모양이다.

한장의 사진에 들어오지 않아 두장에 담아 보았다.  아무래도 누워있는 것이 - - - - - - - .

 

와불전 - 안에 누워있는 부처님 즉 와불이 있다.  저 멀리 산에 마애관음좌불상이 있는 눈썹바위가 보임.

 

 와불전 앞에서 전경을 담아보려고 노력?

 

  석실(나한전)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으로 보아 틀림없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開祖庵)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門)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늘 이  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기도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보문사 맷돌, 절구

맷돌은 옛날 절의 스님들이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석실 입구 오른쪽 삼성각 올라가는 계단 옆 화단에 있다. 석재는 화강암인데, 전체적으로 돌 다듬은 솜씨가 부드럽고 또한 조각도 정밀한 편이다. 둥근 모양을 한 밑 부분의 주연(周緣)에는 흠이 널찍하게 파여져 있고, 맷돌질로 잘게 으스러진 음식물이 밑에 받치는 그릇에 흘러 잘 담아지도록 홈통도 적당한 너비로 파여 있다.

윗돌은 얇게 조성되었으며 역시 주연에 굵직한 테를 양각하고 그 양쪽을 파 놓아 그곳에 자루를 끼워 맷돌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맷돌은 웃돌, 곧 상대석만 남아 있는데 이 보문사 맷돌은 웃돌 뿐만 아니라 아랫돌, 곧 하대석까지 완전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크기도 지름 69cm, 두께 20cm나 되어 보통의 것보다 두 배 가량 된다. 이 맷돌이 이용되던 시절 보문사가 얼마나 많은 스님과 신도들로 성황을 이루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전체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시대 후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인천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맷돌 좌우에 크기가 비슷한 돌절구가 하나씩 있는데 이 역시 맷돌과 마찬가지로 취사용으로 쓰인 듯하다. 왼쪽 것은 높이 58cm, 입지름 66cm, 깊이 30cm이고 오른쪽 것은 높이 53cm, 입지름 71cm, 깊이 30cm이다.

 

 

 

삼성각

나한석실 오른편에 자리한 삼성각.

안에는 칠성 독성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다.

 

 윤장대, 법음루(법고루)의 조화가 아름답다.

  범종각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1975년에 지어졌으며 안에는 그 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범종은 1975년 당시 주지인 정수(正秀)스님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이 215cm, 밑지름 140cm, 무게 5t이나 된다. 조성 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으로서 나라 안팎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본 형태는 국보 제36호인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동종과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을 조화시켜 도안한 것이다.

이 범종은 1975년에 고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화주하여 모셔진 것이라고 한다.

한편 `범종각'이라는 현판 글씨는 강화가 고향인 서예가 박세림(朴世霖, 1924∼1975)의 작품이다.

 

  극락보전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보문사를 찾는 사람을 반기고있다.

극락보전의 내부 넓이는 약 60평이며, 이곳에 관음보살상을 포함해 3,000불이 모셔져있다.

그림의 오른쪽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길이 있는데 관은좌상이 있는 눈썹바위로 올라가는 길임, 후면 상부에 눈썹바위가 보인다.

 

 요사체 : 스님들의 생활에 쓰이는 집 또는 공간

감나무에는 아직도 붉은 감이 매어 달리어 있다. 배 곯은 새들을 위한 부처님의 배려가 아닐른지?  법종각, 윤장대, 법고루(법음루), 500나한 등이 한 화면에 보인다.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

마애석불좌상은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의 계단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나타나는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다. 거리는 약 1km 가량 되는데 오르는 길의 경사가 제법 심해 계단을 지그재그식으로 놓았다. 관음좌상으로 올라가는 이 계단은 1985년 종진(宗眞)스님이 주지로 있을 당시 놓아졌는데 이를 기념하는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중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 계단을 놓으면서 그 수에 있어 의미있는 배치를 해 놓았다고 한다. 처음 12계단을 올라가면 좌우에 석등이 하나씩 있고, 여기에서 108계단을 오르면 ‘관음성전계단불사공덕비’가 있다고 한다. 또 108계단을 오르면 한 쌍의 석등이 또 있고, 다시 118계단을 오르면 반야용선이 있다. 거기에서 48계단을 더 올라가면 드디어 마애관음좌상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계단수는 도합 418개가 된다. 12나 48, 108, 118은 모두 불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상징적인 숫자이므로 그 배치가 더욱 뜻깊다고 함.

 

마애관음좌상 바로 전에 있는 마애관음기도접수처이다. 이곳에는 쉴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 가쁜 숨을 돌려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가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애관음좌상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관음좌상은 약간 비스듬한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데, 상단에는 바위가 지붕처럼 나와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보호하고 있다. 관음좌상의 모습은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럽게 정병(淨甁)을 들고서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은 네모나면서도 덕이 원만해 편안한 느낌이 들고 비교적 넓은 코•입•투박한 귀 등도 서민적인 느낌을 준다. 또 부처님 얼굴에서 빠질 수 없는 백호(白毫)가 양각으로 이마 가운데에 자리하고, 각이 진 어깨에 통견의 불의를 입고 있는데 무릎 아래까지 미치고 있으며 가슴에는 큼직한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좌 아래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등 뒤에는 광배가 있다.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

 

 

화엄회상팔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 , 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慾色諸天衆)

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마애관음보살상은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기도 성지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귾이지 않고 있다.

 

마애관음좌상이 조각되어 있는 눈썹바위의 전경임, 눈썹과 같이 생긴 윗면은 관음좌상이 자연현상(눈, 얼음, 빗물 등)에 의한 풍화작용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데 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올라오는 길 바로 밑의 좌측에 이 곳에서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사실여부는 엄격한 검증이 필요한 것으로 본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하여 볼 뿐이다. 

 

 

 강화도에서 석모도로 오는 길에 많은 얼음덩어리가 바닷물에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중부이남에 사는 사람들은 보기 드문일이다. 특히 금년 겨울에는 냉혹한 추위와  폭설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아침에 올 때는 추워서 배에 실린 버스에서 나오지 못하였다. 보문사를 답사하고 가는 길(석모도 석포리선착장에서 강화도 외포리선착장으로)은 온도가 조금 올라가 진귀한 모습을 담게 되었다. 

 추운 날씨에도 젊은 청춘남녀들이 갈매기를 향해 먹이를 던져준다. 바닷물 위에 떨어진 먹이를 먹기위해 물갈퀴를 찬물에 담가본다.

 

아래 사진은 강화도 관광관련정보사진입니다. 보문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해서 게시합니다. 마우스를 사진위에 클릭하시면 확대된 원본크기를 볼 수 있으며, 웬만한 지명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