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적상산(赤裳山)의 단풍을 찾아서(1)

운학처사 2010. 11. 24. 20:25

  적상산이란 이름은 < 단풍철인 가을에 붉은 치마를 두른듯한 초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하여 >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난 추위에 고지대 나뭇잎들이 냉동건조현상에 의해 요절하고 나니 그 모습이 가련하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고 무색하기도 하여 마음을 지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떠나 접하게 된 보기 드문 광경은 새로운 자연의 외경스런 모습을 보게 되어 보람있는 여행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적상산사고(史庫(실록보관창고))와 관련한 고찰       
  고려·조선시대 역대의 실록(實錄)을 보관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설치했던 창고.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어 없어지자 고종은 1227년(고종 14)에 ≪명종실록≫을 완성하여 한 질은 개경의 사관(史館)에 두고 다른 한 질은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하였다.
  1270년(원종 11) 강화도에서 환도한 뒤에는 실록을 일시적으로 불당고(佛堂庫)에 보관하다가, 1274년 9월에는 중서성(中書省)에 사관을 두고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사관(春秋館의 별칭)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여,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內史庫)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동되었을 뿐이고, 1429년(세종 10)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장의궤(喪葬儀軌)를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하게 했던 것으로 보아 외사고(外史庫)는 충주사고가 그대로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계획에 따라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더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하니, 이로써 내사고인 춘추관실록각(春秋館實錄閣)과 외사고인 충주·전주·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史庫)가 운영되었다. 그 후 4사고는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춘추관·충주·성주의 사고가 불타 버리고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만 병화를 면하였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 등의 노력으로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해로(海路)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별전(普賢寺別殿)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보현사의 실록을 다시 영변객사(寧邊客舍)로 옮겨 두었고, 1603년(선조 36) 5월에는 등서(謄書)의 편의를 위하여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실록의 재인(再印)은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이었으나 1603년 7월에 인쇄에 들어가 1606년 4월에 인쇄가 모두 끝났다. 본래 남아 있던 전주사고본 1질(秩)과 재인본 3질 및 교정본 1질 등 모두 5질이었으므로 이들 실록 5질에 대한 소장처가 논의되었다. 결국 새로이 선정된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을 비롯하여 외사고인 강화·묘향산·태백산·오대산의 5사고가 마련되었다. 내사고인 춘추관사고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화재로 일부가 불탔고, 1627년의 정묘호란 때는 일부가 강화도로 소개(疎開:한 곳에 집중된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것)되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다시 소개되면서 산실(散失)되었다. 외사고는 4사고로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 속으로 옮겨 병화에 의한 소실을 방지하는 데 진력하였다.
  강화사고는 본래 부내(府內)의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있다가 1606년에 마니산으로 옮겨 신설되었고, 1660년(현종 1)에는 다시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사고를 새로 마련하였다. 묘향산사고는 1627년의 정묘호란 때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일어나 1633년 정월에야 적상산성 안에 사고를 마련하고 수호사찰(守護寺刹)을 지었다. 태백산사고는 각화사(覺華寺)가 근처에 있었고, 오대산사고는 상원사(上院寺)와 월정사(月精寺)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다른 외사고들과 마찬가지로 수호사찰을 두고 승려들을 머물게 해서 지키게 하였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뒤에는 실록을 모두 본래의 사고에서 옮겼다.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은 종친부(宗親府) 자리에 새로 세워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分室)에 옮겨졌다가,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져 규장각도서에 있다. 적상산사고본은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보관되어 내려오지만 산질(散秩:秩이 차지 않은 책)이 많고 6·25전쟁 중에 분실되었으나 현재는 북한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대산사고본은 1910년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1923년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 불타 없어졌다.

〔직제 및 관리〕 조선 후기 사고들의 경우 그 건축양식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쪽에 2층 누각식(樓閣式)의 기와집 건물이 두 동인데, 하나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보(璿源譜) 등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이었다.
  사고의 수직(守直)에서는 조선 전기의 경우 충주사고에 수호관(守護官) 5인, 별색호장(別色戶長) 1인, 기관(記官) 1인, 고직(庫直) 1인이 있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외사고들이 산중에 설치되어 불사(佛寺)를 사고의 수호에 정역(定役)시키는 조처가 행해졌다.
그리하여 적상산사고에는 승군(僧軍)이 20인 내외, 정족산사고에는 50인, 오대산사고에는 20인 등이 배속되어 있었으나 시기와 사고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따라서 사고 수호는 수호사찰의 주지(住持)를 예조에서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임명하여 수호 책임을 맡겼는데, 조선 후기 사고들의 수호 책임을 맡은 절들을 보면 정족산사고는 전등사(傳燈寺), 적상산사고는 안국사(安國寺), 태백산사고는 각화사, 오대산사고는 월정사가 수호사찰이었고, 이들 절에 위전(位田:관아, 학교, 사원 등을 유지하기 위하여 설정된 토지)을 주어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경우 외사고의 전반적인 관리 책임은 각 사고마다 참봉(參奉) 2인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하였다.
  실록 등의 서책을 꺼내어 말리는 포쇄(曝碼)는 3년 1차의 규식이 있었으나 시기에 따라 기간의 장단이 있었다. 그 밖에 실록의 봉안(奉安)·고출(考出)에도 까다로운 의식 절차가 행해졌으나, 일반적으로 외사고 실록들을 포쇄할 때는 춘추관의 기사관급(記事官級)이 파견되었다. 외사고에 이르면 반드시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사각 앞에서 네 번 절한 다음에 사고문을 열었고, 포쇄가 끝나서 봉인(封印)을 한 뒤에는 사배(四拜)하지 않았다.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국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이다 고풍스런 모습과 명필의 현판은 감탄스러울 뿐이다. 일주문의 전경을 담아보려고 하였으나 아래에 차를 정차하여 놓아 흉물스런 모습이 될가하여 상단 부분을 담아보았다. 국민들의 의식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멋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무어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된 일이라면 생각을 한번 더 하여 보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이 아닐까?

 

 

 

 안국사 극락전으로 올라가기 전 좌측 해우소(화장실)로 가기전 에 있는 우물

 

 현판에 호국사라고 씌여 있는 것 같음. 안국이나 호국이나 별차이가 있을까?

 해우소(화장실)에 호감을 가지고 들어가 보았다. 실망스런 모습이다. 양변기가 놓여 있으니, 좌측에 있는 양반들은 해우소가 필요없는 분들인것 같다.

 청하루라 안개도 맑은 안개가 있다는 말인지? 아무래도 저자를 찾아보아야 겠다.

 

 

 

 다음 해 봄에 귀여운 잎을 피우기 위하여 깊은 휴식에 들어가 있는 것이리라.

인간이나 자연이나 쉰다는 건 참으로 좋은 것 같다.

 

 그대 절벽의 상부에서 북풍한설을 맞으며 참고 견디어 내야 하리, 그리하면 찬란한 한해가 또 시작되리! 두려워 하지 말게 지난 세월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살을 떼어 내는 추위를 경험하여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더욱 두렵다고, 하긴 그럴수도.  

 

 

 인간의 상상세계는 어디까지 가서 멈출수 있을까?

 

 

 

 

 

 

당간지주라고 하던가요?

 

 

 

 적상산 사고 전경(上)

 

 

 

 

 

 하부저수지(무주호)의 전경

 적상산내부의 구곡간장같은 도로 이곳으로 가면 와인동굴(양수발전소를 만들기 위한 공사터널-현재 무주산림조합에서 머루주를 발효시키는 곳으로 개발함), 양수발전 상부저수지, 전망대, 안국사가 있다.

 양수발전소 상부저수지에 있는 전망대

 덕유산 설천봉-인공눈을 지난 10월 30일에 뿌렸다고 하네요.

 

 

 향적봉에 있는 주목의 고사목-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고 하였던가?

 

 

 

 

 

 

 

 

 

 

 

 

 

 

 덕유산 향적봉에는 고사목이 적지 않게 있는데 주목과 구상나무로 보인다. 잎으로만 보면 주목은 구상나무나 구별하기가 어렵다. 물론 차이는 있다.나무의 색으로 보면 주목은 좀 붉고 구상나무는 회색이며, 외피는 주목은 향나무와 비슷하고 구상나무는 전나무 가문비나무와 같다. 그리고 가지의 뻗은 형태를 보면 주목은 강인함을 주며 불규칙적으로 나고 질서가 부족하게 자란다. 그러나 구상나무는 잎들이 층층으로 규칙적으로 나고 줄기가 곧게 자라 키가 큰 것이 특징이다.